연상연하 짝꿍의 열네 번째편지
브라이스에게
안녕! 정말 오랜만이다!!
근 보름만이야!
그동안 우리에겐 큼직큼직한
일들이 있었지.
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고.
모두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텐데.
그래도 다 치러내느라 고생많았어!
나는 오늘 '한계'에 대해 얘기해보려고해.
오늘 <마술 라디오>라는 책을 읽다가
공감가는 문구가 하나 있었거든.
우리가 흔히 '한계'라는 단어를
떠올릴때 생각나는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책 내용 중에
아쟁 연주가에 대한 얘기가 있었어.
그에겐 스승이 내린 '금지곡'이 있었대.
그래서 비가 내리거나 스승이 없는 날엔
꼭 그 노래를 연주하게 된다는 거야.
그 노래가 뭐냐고 물어보니 '트로트'더래.
작가는 지금 스승이 없으니
한 곡 연주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고,
마침내 그 노래를 듣게 됐는데
진짜 심금을 울릴 정도로 좋더라는 거야.
그래서 대체 왜 이 빼어난 연주를
금지시켰을까하고 오랫동안 고민했대.
그러다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게 됐대.
그의 말을 그대로 빌려볼게.
'우리에게는 서정적 시간도 있지만
엄격한 훈련도 필요해.
왜냐하면 우리 할 일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야.
아무리 우수에 젖어도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일어나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해.
우리의 우수에도 한계가 있어야만 해.
자신을 위로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야만 해.'
자신을 위로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야만 해
나는 뭔가 이 말이 참 와 닿았어.
나에게 하는 말 같았거든.
때론 나의 감성에 빠져들며
내 자신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때도 있지만
이것이 과해지면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보지 못할 때도 있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아.
내 자신에게마저
어떤 경계선을 만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참 가혹하고,
엄청난 자기 절제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보통 '한계'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고립되고 큰 벽에 부딪히는 듯한
갑갑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표현을 보고,
어쩌면 때론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너는 너에게 어떤 '한계'를 짓곤 해?
매번 쉽지 않은 질문을
던져서 미안하구나.
항상 고맙다는 말로 대신하며,
오늘도 좋은 밤 되길 바랄게!
줄리에게,
오랜만이야.
반가워, 정말 반가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또 새롭게 참 즐겁다 :)
'한계'
나한텐 사실 친숙한 단어야.
내 자신에게 참 많은
한계를 지어왔었거든.
내게 한계라는 단어는
자기 절제랑 통하는 말이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절제를 참 많이 해왔어.
(물론 내 속엔 절제를
깨려는 마음들이 항상
꿈틀대지만)
오히려 나는
자기 한계를 너무 많이
지었던 나머지,
나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았었지.
하지만 요즘 줄리와 함께하며
나는 많은 한계를 이겨내는 중이야 :)
고마워.
사실 줄리가 책에서 읽었던
위로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적극 공감해.
한 때 '힐링'과 '위로'가
세상을 뒤덮는 키워드였던 적이 있잖아.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길 원했고,
또 듣기 좋은 말을 들으면서
위로와 위안을 얻었지.
하지만 난 한없는 위로의 결과가
감정에 있어서 무능해진
우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버린 것만 같아.
때로는 자기연민에 빠져버린
위로를 발견하고 따끔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던거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약해진 우리 세대를 보면서
마음이 아파.
우린 잘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힘 대신
'위로'라는 연고만
엄청 발라버린 느낌이랄까.
그래서 난
'한계'라는 단어가
싫으면서도 좋아.
그동안 나를 절제하게 만들었던
한계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끝없는 위로의 늪에 빠졌겠지.
마치 힘들지만 이겨내면
더욱 나아지는 것,
몸에 좋은 쓴뿌리, 운동과도 같은 것.
난 이런 아이러니한
의미를 가진 개념, 존재들이 참 좋아.
내게 한계는 내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쓴뿌리 같은 것.
우리 같이
한계를 이겨내자.
우리는 우리가 넘을 수 있는만큼의
한계만 갖고 있는거야.
함께하면 못 할 일은 없어.
혼자서는 못 넘었을 그 한계,
같이 넘는 우리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