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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라비 Aug 04. 2021

술잔은 두 손으로 받아!

부모님께 영국인 남자친구 소개하는 날 (수저놓기, 술자리 예절가르치기)


P의 자가격리가 끝나고, 하루하루가 소중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드디어 엄마 아빠와 저녁을 먹기로 한 일요일이 되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신발을 사지 못해서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쇼핑을 하려면 일단 밥을 먹어야 하는데 평소 같으면 집에서 토스트랑 과일을 먹고 나갔겠지만 날이 날인만큼, 점심부터 식당을 가기로 했다. 메뉴는 P가 좋아하는 불고기!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고 나서 불고기를 시켰다. 이모님께서 주문받고 가시자마자, 저 쪽 구석에 있는 소주잔을 두 잔 가져왔다. "오늘 엄마 아빠랑 저녁 먹으니까 한국 식사 예절에 대해서 알려줄게!" "Okay, I'm ready!" 그런데 기특하게도 유튜브에서 한국 술 매너에 관련된 동영상을 봤다고 한다. 짜식... 각도가 좀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흉내를 낼 줄 알았다. 아빠가 먼저 술 따라 주는 것을 대비에 한 손으로 술 잔들고, 한 손으로 팔 쪽에 대는 것을 연습시켰다. "이젠 네가 아빠 따라드려야 해. 술 병을 한 손으로 들고, 아까처럼 한 손으로 팔 쪽에 대면 돼." 연습 때문에 소주를 시킬 순 없으니 물병으로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Well done!




술도 술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자리에 앉으면 수저 놓기와 물을 따라주는 것도 예절이니 이것도 가르쳐줬다. "대부분 테이블 사이드에 수저통이 있는 선반이 있고, 나이 순으로 놓는 거야. 기억해! 수저는 왼쪽, 젓가락은 오른쪽이야!" 내 설명을 들은 P는 테이블 좌측에 붙어있는 선반에서 수저를 꺼냈다.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자기 자리에 놓았는데.......

숟가락은 왼쪽, 젓가락은 오른쪽이라고 하고 하니까 저렇게 놨다... WHAT?!



나이프와 포크를 놓는 거처럼 숟가락을 포크 자리에 젓가락을 나이프에 자리에 놓는 것 아닌가."Aicham... P, 같이 놔야 해. 따로 놓는 거 아니야. 하하하하하. You silly!" 엄마 아빠한테 저렇게 놨으면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시작은 했을 듯.




마지막으로 물 따르는 것까지 가르치고 나서 맛있게 점심도 먹고, 신발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원래 남자들은 금방 준비를 하니까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P가 엄청 긴장하고 시간에 쫓기는 게 보여서 여유 있게 출발하려고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를 탔는데, 엄마 아빠에게 짧게라도 한국어로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한다.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이런 건..... 그래도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영어로 써주면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해서 번역해 주었다. 영어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어색해서 한국어 표현을 생각하는 게 조금 어려웠다.



택시에서 한국어로 쓴 짧은 스피치 연습 중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것 같아서 엄마 아빠에게는 우리가 도착하면 나오라고 연락을 했다. 도착한 후 연락을 하고 둘이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10분이 왜 이렇게 긴지. 나도 긴장되는데 P는 얼마나 긴장이 될까. 말도 안 통하고... 네가 고생이 많다. 서로 손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저통 위치가 내 자리 옆인걸 보고, "P, 네가 수저 놔야 하니까 자리 바꿔서 앉자!"라고 하자 넙쭉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 아빠가 도착했고, 우린 서로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으니까 "Now? Now?" "어어 지금 하면 돼." P는 잊지 않고 엄마 아빠 물도 따라 드리고, 수저도 챙겨드렸다. 별거는 아니지만 P가 영국에서 챙겨 온 선물하고 백화점에서 산 한과 세트도 드렸다. 일단 P가 옷도 깔끔하게 입고, 웃으면서 한국어로 인사도 드리고, 물도 챙겨 드리고 하니 엄마 아빠도 처음부터 맘에 들어하셨던 것 같다.




어색했지만 나름 즐거웠던 저녁 식사!



그리고 연습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주문했던 고기가 나오고 소주랑 맥주도 나왔다. 나는 고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아빠가 먼저 P에게 술을 따라 주셨다. 연습했던 대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잘 받았고, 이제 다음은 P이 아빠 술잔에 따라 드려야 했다. 그런데 ...... 아이구, P가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술을 따라드리는데 술병을 너무 떨어서 술잔에 부딪혀서 소리가 났다. 이런 모습은 속일 수도 없는 거고, 오히려 엄마 아빠에게는 플러스 점수가 되었을 듯!




두 시간 정도 저녁 식사를 먹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간 줄 몰랐다.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 적도 없고, 평소에 엄마 아빠랑 내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서 얘기한 적도 거의 없는 터라 이번 저녁 식사가 유달리 긴장되고 떨렸다. 걱정한 것과 달리 P의 노력 덕분인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사실 처음 P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 아빠는 조금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P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셔서 그런지 식사 중에 질문도 가끔 해 주시고 웃어 주셨다. 엄마는 평소처럼 유쾌하게 농담도 많이 해 주시고 P를 많이 챙겨 주었다.(한국인 엄마... 더 먹어~) 예를 들면, P는 오늘 처음으로 돼지갈비를 먹었는데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갈비 소스에 대해서 궁금했나 보다. "이 소스에는 뭐가 들어간 거야? 정말 맛있다." 엄마한테 이 말을 전하니 "그건 비밀이야! 공짜로 알려고 하면 안 되지!" 엄마 덕분에 어색할 수 있었던 저녁식사가 즐거운 시간으로 바꼈다.




우리 집이 바로 옆이라서 2차로 집에서 맥주 한 잔 하기로 했다. 엄마가 P가 온다고 네이버에 "맥주 안주"를 검색해서 만들었다는 진미채 버터 볶음과 과일, 그리고 맥주 몇 병을 나눠 마셨다. P는 이미 고기를 많이 먹어서 배가 너무 불렀는데 엄마가 자기 때문에 만드셨다고 하니 일부러 더 집어 먹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집에 가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왠지 짠하고 기특... P는 매일 영상통화 배경으로만 보던 내 방을 처음 보고, 나는 P가 우리 집 소파에 앉아서 아빠랑 티비를 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집에 오니 기분이 참 묘했다! "난 네가 내 방에서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어색하게 거실에 있었어?" "말 안 통한다고 방 안에 계속 있는 건 좀 그렇잖아. 일부러 거실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뭐 조금 어색하긴 했어." 녀석, 나보다 낫네.




집에 식탁도 있긴 한데 우리는 거의 거실에 있는 상을 두고 바닥에 앉아서 먹는다. 아빠가 P가 불편할테니 식탁에서 먹자고 하긴 했지만 식탁 위에 있는 것을 치우고 하기에는 조금 번거로워서 그냥 바닥에서 먹기로 하고 앉았다. 한참 지나고 엄마가 "방에 가서 방석 좀 가져와." 아 P가 불편하겠구나.. 나도 생각을 못했다. 가져와서 주긴 했는데 방석이 있어도 영 불편한가보다. 엄마 아빠가 쇼파에 앉으라고 몇 번 얘기를 해서 결국엔 쇼파에 앉았다.




집에서는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름 아닌 엄마의 어플 덕분이었다. 엄마가 전 날 구글 번역기를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법까지 연습을 하고, P에게 나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질문을 하고 싶었단다. 첫 질문은....... (우리 엄마가 이 질문을 할 줄 몰랐지만..) "P는 우리 딸이 왜 좋아요?"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웃긴 동시에 부끄러워서 내 방에 가고 싶었다. 아이고. 번역도 이상하게 되어 내가 다시 물어보기까지 했다. P가 질문을 듣고 씩 웃더니, 어플에 대고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가장 진지한 건 우리 엄마와 아빠. 대답을 듣더니 흡족한 엄마는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나요?" "P는 어떤 사람이에요?" 엄마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고 P도 나름 열심히 대답했다.




P가 타이밍을 보고 셔츠 주머니에 있던 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P가 한국어로 짧은 메세지 준비해서 왔대. 들어봐." 이미 시작도 전에 엄마는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가족은 소중해요. 오늘 만나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몇 줄 더 있었는데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아무튼 발음도 꽤 괜찮았고, 하고 싶은 말의 의미가 모두 잘 전달되었다. 아빠는 원래 표현을 안 하는 사람이라 흡족히 듣고 계셨고, 엄마는 P가 마치자마자 "마음이 예쁘네."라며 고마워하셨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덧 저녁 10시가 거의 넘었고, 슬슬 갈 채비를 했다. 엄마는 김치랑 반찬이랑 P가 "좋아하는" 진미채 버터 볶음도 챙겨 주셨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P에게 고생했다고 꼬옥 안아주었다.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웠을 자리인지 아니까... 한 편으론 많이 고맙기도 하고. 고생했어, P!




자기 전에 나가서 맥주 한 잔만 더 하자고 제안하는 P. 어색하게 맥주 하시면서 술 느낌도 안 났을 테니 둘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 캔씩 들고나가서 야외 벤치에 앉았다. 나는 식사 내내 엄마 아빠가 P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P는 엄마 아빠가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내.. 내가 통역을 제대로 안 했나? "P, 나는 첫 식사였는데도 너무 즐거웠고, 좋은 시간 보냈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잊지 못 할 긴 하루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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