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 가지만, 네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줬으면 해"
영국인 남자친구인 P는 2주 간의 호텔 자가격리를 마치고, 한국으로 오기 전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나와 한 달 동안 같이 지냈다. 그리고 오늘은 벌써 P가 영국으로 돌아간 지 딱 3주 되는 날이다. 시간도 참 빠르지.
P의 마지막 주가 되는 월요일.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아침 먹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 주가 되니 하루하루가 참 소중했다. 그렇게 P를 뒤로하고 출근을 했는데 몇 시간 뒤에 "띠-링"하고 문자가 온다. "나 오늘 기분이 조금 다운이야. 한국에서 지낼 마지막 주이고, 이제 곧 떠날 거니까...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오늘도 일을 좀 더 찾아볼게. 퇴근하고 저녁에 봐 x"
내가 작년 8월 말에 런던을 떠나고 나서,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올해 초에 P가 한국에 들어왔어야 했다. 한국에서 잡오퍼를 받고 비자 서류를 진행했고, 그 서류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에 한국 정부에서 당시 영국의 돌연변이 바이러스 때문에 갑자기 모든 신규 비자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뉴스였다. 당장 P를 볼 수 없다는 슬픔보다 우리에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던 P는 한국으로 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집도 내놓고 직장에도 이미 노티스를 준 상황이었다. 그렇게 P는 하루 만에 이직할 직장도, 앞으로 지낼 곳도 없게 된 것이다. 이때를 생각하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말도 표현할 수 없이 미안하고, 죄책감도 들고 (그 흔한 사랑이 유죄..)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이후 몇 개월 뒤에 비자가 풀린 이후에도 막연하게 잡 오퍼를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 우선 한국으로 한 달 정도 들어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느 국제커플이 겪고 있듯,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9개월 만에 만났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참 길 줄 알았는데, Time files when you are having fun. P와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벌써 그렇게 마지막 주라니.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마지막 주 월요일, 우리의 상황은 확정된 잡오퍼가 없는, 즉 영국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올 지 계획이 없이 돌아가게 되는 거였다. 면접을 보고 P를 마음에 들어 했던 회사가 있었지만, 서류 때문에 회사에서 필요한 시기에 못 맞출 것 같아 거절 아닌 거절을 당했다. 마지막 주가 되니 내가 조금 더 찾아볼걸, 내가 조금 더 도와줄 걸 하는 등의 자책 아닌 자책을 하기도 했다. (Long story short, 잡 오퍼받고 8월 말에 입국 예정이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다행히도 P 기분이 아주 다운되어 있지는 않았다. 원래 부모님과 살 때는 저녁에 간식 같은 거 먹지 않고 그냥 이것저것 하다가 잠들었는데, P과 같이 지내면서는 저녁에 뭔가 나만의 시간이 생기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집에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너무 좋았고, 같이 맥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하는 것도 너무 좋고, 그냥 같이 티비 보고 그런 소소한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날도 그런 평범한 하루였다. 우리는 평소처럼 간단한 저녁거리에 맥주 한 잔 하고 있었다. 거의 맥주 한 캔을 다 먹을 때쯤 P가 묻는다. "저녁에 날씨도 좋은데 너무 피곤하지 않으면 나가서 좀 걸을까?"
자정이 거의 다 된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산책을 나갔다. 나는 P랑 걸을 때 대부분 왼쪽에서 걷고, 그날도 평소처럼 왼쪽에 서서 손을 잡으려고 하니까 시답잖은 말로 둘러대면서 자리를 바꿨다. '뭐야..' 뭐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날은 그냥 P의 오른쪽에서 걸었다. 항상 가던 길과는 다른 길로 걷다가 공원 안에 있는 정자를 발견하곤 잠깐 앉아서 쉬기로 했다. 나는 앉아있는데 P는 앉지도 않고 서서 서성거린다. "P, 앉아!" 그런데 P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응? 순간 무릎을 꿇으려다가 갑자기 다시 서더니 내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넨다. "선물이야." 열어 보니 반지였다.
"P...(감동의 눈빛)" "아직 프로포즈하는 건 아니고, promise ring이야. 나는 이제 곧 여기를 떠나지만, 네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줬으면 좋겠어." 반지도 반지지만 이 반지가 의미하는 바가 너무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인 나는 한 편으로 왜 이 반지는 한 개일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 받았는데 묻기도 좀 그래서 일단 내 손에 끼고 조금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고마워, P!
사실 반지 사이즈가 커서 그 다음날 같이 가서 사이즈 교환했는데,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결국 수령하러 가는 날에는 P는 한국에 없었고 혼자서 다녀왔다. 주말에 다녀오고 저녁에 P에게 연락을 해서 반지 찾아왔다고 하니 맘에 드냐고 물어본다. "응! P, 그런데 왜 반지가 하나야?" "내 반지? 네가 주면 되잖아. wink wink" 응? 내가?
Promise ring에 대해서 좀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커플들이 끼는 커플링보다는 의미가 조금 더 깊은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도 진지하게 만나는 경우에 커플링을 하지만, 내가 20대 초반에 했을 때 결혼까지 생각해서 한 거는 아니니까 의미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일랜드나 영국에 있을 때 약혼이나 결혼하지 않은 커플들이 반지를 끼고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Promise ring은 pre-engagement ring 정도로 설명이 되며, 경제적이나 타 이유로 인해 지금 프로포즈(약혼)를 할 수는 없지만, 파트너에게 그만큼 진지하게 만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에 아주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정도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심지어는 유튜브에 여자친구에게 promise ring을 주는 영상들도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서는 promise ring을 많이 하지도 않는 편이고, 하더라도 여자들이 끼는 것 같아서 P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내가 반지 사주면 하고 다닐 거야?" 이에 그렇다고 대답은 하는데, 나는 반지를 일단은 사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P만큼 우리 관계에 대해 덜 진지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 이건 문화 차이인 거 같은데 반지 끼라고 주면 P가 괜히 불편해할 것 같은 느낌.. 음,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면 당연히 사줄 의향은 있으나 우선은 나만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Aic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