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시험의 존재란
'시험에 든다'는 말을 들으면 그다지 유쾌한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이다. 구 자체의 의미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뉘앙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갖는 사전적인 의미는 여러개가 있지만 분명한 건 12년의 학창시절을 거쳐온 우리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결코 주지 못하는 단어임은 분명하다. 비단 누군가를 속이려 덫을 놓는 행위도 상대의 능력치를 테스트해본다는 의미로 이 단어가 활용될 정도이니 단어가 우리에게 행사하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늠할 정도다.
사회에서 시험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유는 단순히 산술적인 가치로 사회인의 가치를 함부로 재단하고 옭아매기 위한 섣부른 제도인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간혹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더더욱, 내가 쌓아아온 시간과 노력의 에너지가 축적되었다는 이유로 하나의 철옹성을 빚어낸다. 이 안에서 나만의 시각과 기준만으로 결과물의 평가를 내리다보면 객관적인 완성도를 개발시키는 내가 아닌 단지 '해왔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는 나만 남게된다. 꼭 타인에게 평가를 받기 위한 결과물만을 낼 필요는 없다. 내가 애정을 갖고 대하던 분야라면 단지 '행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열과 같은 정량적인 기준과는 상관없이 가치있는 행위로만 오롯이 남아있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다보면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매 순간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게된다. 어, 그러면 이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을 하며 이어오고 있다고 생각해온 심리적인 안정감과 안온함은 불현듯 침범받는다. 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야 능력치에 따라서 페이가 달라지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납득할 만한 논제라고 넘긴다고 하자. 능력치를 기르기 위해 노력해온 바는 업계에서 마땅한 '결과'로 대우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좋아서 시작한 취미같은 것에도 잘하니못하니의 기준으로 타인과 비교하며 괴로워한다.사람들이 구태여 압박이라는 가치를 덧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사회구조를 살짝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취미로 시작했든 업으로 유지하고 있든 타인에게 역량적으로 열세라는 사실을 의식하기 꺼려한다. 이것은 비정량적인 가치들도 구태여 수량화 시키기 좋아하는 한국사회의 유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대한민국은 625전후 타국의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의 인재를 부지런히 양성시켜 무려 전례없는 케이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다. 물질적인 자본, 즉 하드웨어가 전무하다시피한 환경에서 출발했기에 소프트파워를 기르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70년대 초기, 수출중심의 산업을 육성하고자 중화학 공업시설 투자에 올인해 지금의 대기업육성 자본주의시스템이 태동했다. 그리고 이 또한 가시적인 성과를 즉각적으로, 눈앞에 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극강의 조직 내 효율화를 위해 단기간에 시스템을 잘 파악하고 운영할 줄 아는 걸출한 자격의 '임원'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람이 아닌 기업의 부품으로서의 '임원'에 더 정체성을 두는 엘리트주의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엘리트주의를 도출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쉬운 방법은 바로 학벌제도였다. 명문대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를 줄세운 '라인'이 만들어졌고 국민들은 좋은 스펙과 좋은 대학교를 나온 이들이 어떻게 군집을 이루고 그들이 공고히 한 카르텔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 지를 지켜봐왔다. 학벌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가장 쉬운 길이기도 하며 가장 측량하기 쉬운 기준이기도 하다.초중고 시기 동안 들여야하는 노력과 스펙, 인내력을 가타부타한 긴 문장들의 향연없이 '대학 간판'만으로도 모든 것을 단순하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발전과정 자체가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의 안개 속에서 침침한 눈을 계속 비비고 살아와야했던 국민들의 구조화된 의식이 시험이라는 제도가 추앙받는 과정을 망연히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된것일지도 모른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앞서말한 엘리트 사회라는 대한민국을 이루는 그리고 가장 잘 설명하는 원초적인 단위라 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치는 주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측정되면 안된다고 질타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쓴다든가 그림을 그린다 하는 정량적이고 수치화된 개념으로 평가할 수 없는 예체능 계열의 영역이 더욱 그렇다. 나정도면 잘 하는 편이라는 믿음을 침범받고 싶지 않아하는 이들에게 특히 불시에 찾아온 타인의 예리한 지적은 노력이라 생각하고 들여왔던 모든 시간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파급력을 선사한다. 하지만 뭐 좋아한게 잘못인가. 하다못해 주관적인 취향이 퀄리티 신장을 이루었냐를 판단하는 심사기준이 되는 분야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자격증이나 수능, 각종 입사시험과 같은 객관적 시험체제는 어떻겠는가. 오히려 주관적인 평가 한마디로 당락이 결정되는 예체능 영역보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객관심 시험에서의 결과는 차라리 결과에 승복하기는 쉽다. 객관식 시험체제의 장점은 문제마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전적인 지식들이 수놓아진 기본서를 달달 외운다거나 기존에 출제된 기출문제들을 푸는 것만으로 대비가 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지식 습득에 일정한 시간을 진득하게 할애만 한다면 합격 목걸이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적인 단순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특히 대한민국에는 각종 '정량스펙'이라고 불리는 시험제도들의 개수가 셀 수 없다. 소위 객관적 기준치에 있어 성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니 '평범한 삶' 정도만이라도 정착하기 위해 생애주기별로 나이마다 취득해야하는 자격증가 시험 리스트들이 즐비하게 존재하니 말을 다한 정도다. 대한 민국의 기업과 학교라는 사회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단위와 이의 구성원들이 시험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한민국이 자라온 과정과 분위기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본인의 능력치를 의심하게 만들고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스펙을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채찍질을 해왔기 때문이다. '시험'이라는 제도에 길들여져야만 한다는 채찍질이 시험이라는 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며 선호하게 만들고 종용한 것이다. 끊임없이 '객관성'을 타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증명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본능도 성공을 쫒아야 엘리트 계층으로 사다리가 놓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설파하는 대한민국의 전통이 한몫한다. 대한민국 특유의 차갑고 매캐한 압박감은 객관적인 기준에 있어서의 성장이 없는 인풋은 시간의 흐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개인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조종한다. 공고한 경제체제의 유지를 위해 성공한 사회구성원을 길러내려는 보이지않는 거대한 손과 같은 모습으로 대한민국은 변모되었다.
한국의 개인들이 끊임없이 '객관성'을 증명받고자 괴로워하는 본능도 성공을 쫒아야한다는 사회적 메시지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성과를 단기간에 쌓아내는 것에 성공하여 눈부신 선진국으로 도달할 수 있던 대한민국이기에 앞선 선배들이 일군 '성과 중심주의'의 DNA를 계속해서 전수받아야 할 운명인 것이다. 경제 및 문화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놓고본다면 눈부시고 참 좋은데, 애초에 인과관계가 단단히 뒤틀렸다고 보이기도 한다. 인재들을 감정없는 기계가 되도록 양성하고 이 양성의 틀을 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온갖 산업, 문화, 학업에 이르는 현존하는 모든 분야들에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사회가 만들어낸 이 시험이라는 기준은 누군가에게는 내 실력을 성장시켜야한다는 집착이 되어 해당 분야를 계속해서 쫒게하는 추동력과 야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이 학대에 못이겨 사랑해 마지 않던 분야마저도 더이상 애정이 아닌 '오기'로 접근하게 만들어 결국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포기냐 야망이냐 하는 다소 극단적인 양상을 추종하는 대한민국 시스템에서 살아온 학생들은 자라서 사회인이 되었고, 이들은 결혼을 한 이후로도 이 포기와 야망이라는 양 극단으로 나뉘게 되엇다. 좋아하던 일이 결국에는 야망으로 변형되어 아득바득 성공과 부를 쟁취하게 된 계층은 자녀를 낳아 본인들이 제공하는 인프라를 통해 부를 승계하고자 한다. 본인이 성공을 이룩해낸 근성까지도 전승되었으면 하는 것일까. 양질의 환경 속에서 시작한다 해서 성공을 향한 독기를 품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저쪽 끝단에 있는 계층은 아까 말한 대로 채찍과 오기에 견디지 못해 사랑하는 분야를 포기하고 방황하게 된 이들이다. 이들에게 좋아하던 것은 어릴 때 자기계발로 엄마가 시켰던 학원 같은 먼 추억같은 기억으로 아스라이 남아있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 이전에 공부하는것부터 먼저 배웠거나. 아니면 무엇을 좋아하기 시작했더라도 어느 분야든지 비교의 올가미로 숨을 못쉬게 하는 풍조에 포기에 이르른 사람들이 모두 해당된다. 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알거나 되찾는 것은 커녕 사회에서'그럭저럭'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 중산층으로 편입하고자 아등바득 노력을 이어오고 있느라 본인 챙기는 앞가림도 힘들다. 뭘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라니. 새삼스럽지만 얼마나 삭막한가. 이 계층에게는 결혼을 해서 본인의 행복을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바라는 꿈이자 목표이기도 하고, 동시에 트라우마 같은 것이기도 하다. 당장 본인들도 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부담감 때문에, 새로운 가정을 만들 여력같은 것이 남아 있을리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인의 적성이 본래부터 어떤것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환경으로 자라기 시작해야 한다. '오기'에 의해 파생된 행복이 아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행복과 가치가 무엇인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내 관심 분야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봐야한다.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는 내 삶을 남과의 비교에서 멈춰세운 채 들여다보아야할 여유를 가져도 된다며, 구성원에게 숨을 쉬어도 된다는 말을 건네는 사회의 창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본인이 원하는 것을 타인과의 비교로든, 부모에 의한 압박으로든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하지 않게끔 하자. 그동안 사회가 우리를 자본주의와 엘리트주의라는 삭막한 '시험' 에 들게 했던 프레임을 조금씩 걷어내고 조금씩 행복해지는 법을 터득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