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

지금은 좀 다를까

by 물 결




인생 처음으로 몸을 뉘일 집과 가족을 잃은 정원이가, 어떤 모습이든 제일 사랑해줄 사람을 잃은 은호가 수렁으로 빠져들며 절망하는 모습은 길게 조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털어내고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도리어 집중한다. 원작과 차별성을 줌과 동시에 고난과 아픔을 치유할 새 없이 현실을 고쳐나가야하는 대한민국의 청춘의 모습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둘의 문제가 아닌 고단한 상황을 보여준 게 좋았다.

한국판의 장점은 흔들리는 두 사람 주변의 상황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사랑은 그대로지만 각자의 가혹한 환경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며 마음의 틈을 낼 여유와 기력을 잃어가는 것에 더 방점을 둔 것이다. 불안정한 길을 계속해서 헤쳐나가야만 하는 한국의 청춘들을 연애물을 표방한 작품을 통해 다독여주려는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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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는 장르적인 수단이고 정착되지 않은 시기를 보내고 있을,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온 이들에게 우리가 힘든 건 우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그런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같다.


원작과는 스토리는 같지만 두 주인공의 성격도 그렇고 국가적인 고증과 정서가 꽤 다르다. 원작은 과거보다는 현재에서 조금 더 격정적인 진폭을 전한다면 한국판은 시대적인 감성을 살려 두 사람의 밝고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비중을 더 크게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한국판이 시대 고증을 기대보다 잘해줘서 더 재밌게 봤다. 두 영화의 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도 포인트다.

한국을 살아가는 청춘이 느낄만한 심리적이나 상황적인 변화와 상처를 묘사하는 디테일이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섬세했다. 정서적인 면에서 확실히 로컬라이징을 하는 데에 정성을 많이 들인 태가 난다.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작위적인 영화같은 대사들은 다 빼고 두 사람의 연기와 연출과 각본의 힘만으로 승부를 보는 흔치않은 멜로영화다. 특정한 순간들을 초반과 후반에 수미상관으로 가져오는 장면과 시퀀스를 감성 잡는다고 오래 끌지 않고 빠르게 전환하는 연출도 자연스럽고 좋았다. 특히 과거 연애 장면에서는 원작보다도 더 인물들을 입체적이고 생동적인 캐릭터로 만든 점도 그랬다. 옆 자리에 앉은 커플들이 툭툭 뱉을 만한 그리 유별나지 않은 투박한 대사지만 수려한 연출들로 마음을 쉴새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그시절 서로를 잃었기에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었던 우리. 지금 모습으로 만났더라면 좀 다를까 따위의 생각들은 언젠가의 모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깊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헤어진 후 아팠을 그들이 애처롭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가혹했던 거라고 믿으면서 마지막을 뒤척였던 어떤 날의 내 모습과도 겹쳐졌다.

먼 훗날 남이 되어서라도 우연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꿈에서라도 간절하게 그리는 청춘들의 염원을 대신 이뤄준 영화같다. 이렇게 우연찮은 기회로 조우해 서로를 이해하고 어렸던 서로를 용서하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한번쯤은 꿈꾸니까.

그 때가 아니라 지금의 더 성숙해진 나였으면 조금 달랐을지, 그때 선풍기를 내쪽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같은 사소한 이야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쉼표를 남기며 이야기 할 수 있게된 그들이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참 부러웠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간 이런 퀄리티의 멜로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싶다. 원작의 팬이어도 만족스럽게 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오랜만에 진솔하면서 울림이 큰 한국영화가 나온 것 같아 참 반갑다. 지금 추이로 보면 300만은 가뿐히 넘을 것 같은데.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극장에 걸려있기만 하다면 주구장창 보러갈거라.

#만약에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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