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되는 일이 어디있나

by 배상근

여러 기술의 혁신은 전쟁에서 나타난 경우가 많다. 생존이 걸린 싸움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도 남북 간의 경쟁에 도움을 받았는데, 강대국 간의 각축장이 된 나라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부문에서 동시에 여러가지 혁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 하지만, 여러 부문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노력하니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던 시절에 한국에 새로 부임한 외국인 감독은 초기부터 강팀과의 연습시합만 잡았다. 선수 개인의 기술적 수준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거 같은데,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선수들의 정신력도 훌륭하다고 판단했을 거 같고, 연패를 거듭하는데도 약팀이 아니라 강팀과의 시합을 밀어부치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기술이 아니라 체력이 부족했었다고 새로 도입한 과학적 체력 훈련의 효과가 컸다는 얘기도 나왔었는데, 감독은 부족한 것이 강팀과의 시합 경험이라고 판단했었던 것 같다. 이미 선수들의 기술 수준도 괜찮고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은 어느정도 준비되어 있으니, 그에 맞게 전술을 짜고 강팀과의 경험을 쌓기 위해 시합만 시켰던 거 같다.

어린 시절에 많이 하는 농구나 축구 시합을 해보면, 평소에 잘 하다가도 중요한 경기에 나가면 잘 못하는 친구가 있고, 중요한 경기에 평소보다 더 잘하는 친구가 있다. 프로 선수도 포스트 시즌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경기에서 더 잘하는 선수가 있고, 이런 경기에서 평소 실력을 못 발휘하는 선수도 있다. 큰 시합에서의 부진으로 팬들에게 질타를 받은 이후, 자극을 얻어 경험을 쌓으면서 더 발전하는 선수가 있고 성장이 거기에서 멈추는 선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상황일수록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역량이 나오는 것이고, 경험을 통해 익히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대체로 비슷한 수준의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행동을 하면서 얻는 능력으로 선수들마다 개성이 나타나고, 얼마든지 타고난 신체 능력의 차이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세상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강증진의 정의를 보면 역량 강화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의사가 하는 치료나 말은 거의 동일하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환자의 노력이 자신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방의학을 하면 집단을 대상으로 얘기할 때가 많은데, 연구를 하든 행정을 하든 교육을 하든 인구집단의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고, 결과는 집단 전체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지, 의사가 하는 반복적인 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환자 개인이나 집단이 건강을 위해 행동을 바꾸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될 수가 없다.

의사는 질병에 대한 진단을 하기 때문에 건강과 관련된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의견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시골과 도시의 의사수나 병원 시설, 인구학적 특성이나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다르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는데, 상황에 대한 의사들의 판단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가서 고가 의약품이나 장비 도입이 우선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듯이, 의사가 하는 일이 기반이 되더라도 사회 전반의 발전과 사람들의 건강 수준은 함께 향상된다. 기본적인 위생이나 보건 수준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고, 대부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역량이 올라가야 하는데,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개인의 건강도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듯이 의사 업무 외에 다른 일들은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보건의료체계가 충실히 갖추어져 있는데, 다른 영역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발전이 지체되고 있다. 세부적으로 환자 치료와 연계된 전문서비스는 꾸준히 발전해왔으나,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은 오래 전부터 변화가 없다. 이는 의사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인데 여러가지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변화가 지체되니, 특정한 세부 영역별로 전문 지식을 얘기하면서 예산 경쟁에 뛰어들지만, 전문 영역의 노력만으로 인구 집단의 건강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와 연계되어 민간의 효율성을 얘기하면서 의료 기술의 효과를 얘기하고, 환자의 문제를 소재로 공공분야 투자를 얘기하거나 의사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예산을 따내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환자 치료 이외에는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인 역량이 함께 올라가지 않으면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기본적인 체계가 충분히 갖추어진 분야에서 문제가 나타나는 단위에 맞도록 권한을 넘기는 것도 아니고, 개혁이라 얘기하고서는 세부 영역별 예산을 편성해서 줄세우기나 하는 것을 보고 생계형 파시즘이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필요한 일들을 시도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의 계엄과 야당의 탄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사회 문제에서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인력 양성과 함께 제도적 권력 분산이 중요한데, 의료체계는 이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있다. 사회 문제는 의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는 여러 문제에 해결 방안도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 건강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의사 집단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는데, 의사가 하는 일이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계엄을 하기도 했지만,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식을 나누고 사람들의 역량을 높이는 일에 여러 경로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이유없는 칭찬도 비난도 나타나지만, 건강 관련 문제에서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면허제도가 있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구집단의 건강 문제는 반드시 의사나 전문 영역의 업무를 중심으로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 스스로 인지하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는데, 방송에 나와서 전문 지식 자랑이나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 소속된 집단의 홍보용이고, 이는 의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적 성격을 너무 잘 알아서 의사 비난으로 정치 소재나 만드는 것도 현실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코로나 시기와 의대정원 정책 시기를 거치면서 의료 분야의 방향도 바뀌어야 하는데, 집단적 문제를 다루는 데 최소한 지식을 통해 기여하는 것은 필요하고, 이를 넘어 사회 전반의 역량을 높여 문제가 해결되도록 이끌어가지 못하면 정치적인 비난은 피할 수 없다. 의료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치에서 권력을 향한 경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데, 사회적으로 문제가 누적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있나.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이 어디있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 부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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