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후 정치적 변화의 의미

by 배상근

어린 시절에 게임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예전에 동네마다 오락실이 있었는데 돈도 없으면서 어두워질 때까지 다른 사람이 게임하는 걸 보고있다가 찾으러온 부모님한테 끌려나가기도 하고, 잘 하지도 못하면서 형들이 하던 인기 대전 게임을 하다가 용돈만 날리기도 했다. 집에 컴퓨터가 생긴 뒤로는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는 척하면서 각종 컴퓨터 게임을 하고 다녔다.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온라인 게임으로 돈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 나름 유익한 것도 있었는데, 당시에 삼국지 게임을 하면서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삼국지 소설은 철저하게 당시 중국 지배층 입장에서 각색된 이야기인데, 우리말로 번역된 소설은 번역자가 자기 관점을 또 첨가한다. 삼국지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도 많은데 2010년대 초에 중국에서 소설을 중심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해석해서 나온 이후로는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소설에 담긴 이야기에서 근대 국가가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시민의 민주적 역량과 같은 요소는 없고, 현 시대에서 더이상 의미있게 이야기할 내용이 없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져야할 시민의 소양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나 윤리 과목에서 개념적으로 가르칠 뿐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가 정치적 문제 때문에 이야기하기 어렵다면, 고대 아테네나 서구 유럽, 미국의 건국 과정이라도 사실 그대로 가르쳐야 근대 국가의 형성 과정과 운영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데, 윤리 교과서의 철학 개념을 고등학생이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집단적으로 교육이나 토론이 될 수가 없다.

우리나라가 권위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언론이나 정치에서 공식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소설 삼국지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서울대에서 가장 인기있는 도서가 '총, 균, 쇠'라는 것은 기사로 본 적이 있는데, 집단주의가 강한 나라에서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군사력, 정치, 기술 진보와 같이 역사적으로 권력과 관계된 지식을 충실히 쌓는다. 해방 이후에 그 고생을 해가면서 근대 국가를 만들어놨는데, 삼국지 수준의 얘기로 현실을 가리고 온갖 정치 기술을 써서 집단으로 이권을 챙기려 하는 것을 보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은 고학력뿐만 아니라 다들 지식이 충만한지 여러 집단들이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중동처럼 겉모습만 국가인 부족 사회로 바뀌겠다.

이번 대통령의 계엄은 있는그대로 판단해야 하고, 탄핵을 주도한 야당이나 언론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해방과 분단 이후 여러 지도자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세워진 나라이고,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거 같다. 국가를 운영하는 집단은 권력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시민들도 집단적인 일에 참여해서 함께 역량을 키워서 비합리적인 일들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도 있어야 한다. 과거 대통령들은 강제로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현재의 일부 정당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집단은 조금의 권력도 분산하려 하지 않고, 선출직 대통령도 법도 무시하면서 협박한다. 헌법 재판소가 사람들의 삶에서 실현되어 있는 법도 무시하는데, 이를 막아내는 것은 국민들의 정치적 이해가 높아져서 삼국지 수준의 선동질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광범위하게 나타나 역량이 높아져서 국가의 운영이 자연스럽게 견제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권력 투쟁은 치열하고 때로 법을 어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나오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윤 대통령의 계엄은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정치적, 역사적으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에서 정치소재로 써먹는 소설 삼국지와 비슷한 권위주의 국가들의 이야기들이 아직도 나오지만, 사회적 결집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이번 경험은 국민들의 민주적 역량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본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일에서 행동으로 익히는 것이다. 아직 제도적 기반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니, 여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법이나 제도들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계기로 삼으면 되겠다.

개인적인 바램인지,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가기를 기대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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