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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May 25. 2020

내 수능 도시락은 미역국이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나름 큰 산(?)을 넘은 지 벌써 7년이 넘었다.

그때 대구는 야자를 강제하는 분위기였기에 7시 30분에 등교해서 11시 10분에 하교를 했다. 그래도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인 서울 하겠답시고 고3 한해 열심히 공부했다.

집에 돌아오면 11시 40분쯤, 씻고 잠을 자면 12시였다. 체력에는 자신이 없어서 단 한 번도 새벽 공부를 한 적은 없었는데, 엄마는 종종 야자하고 돌아오는 나를 위해 야식을 챙겨주곤 했다.


10월 모의고사를 치고 수능이 다가올 때쯤, 엄마가 수능 도시락으로 어떤 메뉴를 싸줄지 물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역국!


하고 대답했다.


보통 중요한 시험을 치는 날 남들은 미역국 먹으면 미끄러진다고 안 먹는 편인데. 너는 왜 하필 미역국이냐.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고 맛있으니까.


하긴 어릴 때부터 미역국을 좋아하긴 했지. 그럼 반찬은 뭐가 먹고 싶냐고 묻기에

늘 먹던 집 반찬에 스팸 하나만 구워줘! 했다.


좀 맛있는 걸 싸 달라고 하지 그거면 충분하냐. 나는 그렇게 먹는 게 제일 좋다고. 평소에 안 먹던 거 먹으면 잘 볼 시험도 망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너는 수능 도시락 뭐 싸올 거야? 하기에 나는 미역국 싸올 건데 했더니. 질색하는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소영이 도시락은 나눠먹지 말아야지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고 살짝 겁이 났다. 그냥 나도 죽이나 싸갈까? 아냐. 그래도 사람이 뚝심이 있어야지!


그렇게 수능날이 되었다. 

엄마가 찍어둔 수능 도시락 사진, 7년이 지난 지금도 삭제하지 않았다고


유난히 어려웠던 국어, 평소보다 계산이 어려웠던 수학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왔다. 고3 내내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올랐던 나에게 오전 시험 난이도는 멘붕 그 자체였다. 어쩌지 이러다 재수하는 거 아냐. 아니야 그래도 수시로 쓴 학교 하나는 붙겠지. 정시 성적으로도 갈 수 있는 곳이었잖아. 스스로를 위로했다.




복도 구석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책상을 붙이고 챙겨 온 도시락을 하나 둘 꺼냈다. 한 친구는 수능 한 달 전부터 매일 저녁 도시락으로 먹던 떡갈비를. 어떤 친구는 죽을. 어떤 친구는 김밥을 싸왔다. 내 도시락을 보고는 와 소영이 농담 아니고 진짜 미역국 싸왔어? 하고 웃으며 긴장된 분위기를 잠깐이나마 풀었다.


도시락 백을 열었는데 도시락 통 위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우리 준비한 만큼 시험 치라는 엄마의 응원의 쪽지.

순간 눈물이 났다. 엄마 미안해. 준비한 만큼은 못 친 것 같은데. 그래도 친구들 앞이니까 울진 않을게.

 

도시락 통을 열어보니 미역국에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 스팸과 밥이 있었다. 엄마 성격상 그냥 스팸을 잘라 굽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쿠키를 닮은 귀여운 스팸들이 보였다. 밥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 두 조각. 전부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네.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쌌을 엄마를 생각하니 내 오전 시험의 결과는 그 정성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미역국을 한술 뜨니 내가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미역들만 있었다. 평소에 미역줄기는 질기고 두꺼워서 안 먹는데, 엄마가 일부러 미역줄기를 빼고 넣어줬나 보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엄마도 알 거다. 내가 입이 짧아서 많이 먹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도 미역국만은 싹싹 긁어먹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영어 시험을 치렀다. 배가 불러서 그런가. 평소보다 영어를 잘 친듯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탐구영역이 평소보다 어려웠지만, 수능 시험은 끝이 났고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망친 줄 알았던 국어와 탐구영역은 점수가 꽤 잘 나왔고, 수학을 평소보다 못 치긴 했지만 수시 지원한 학교들의 최저는 모두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지원했던 학교 중 하나에 합격했고,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도 했다. 


조촐한 자취생 밥상


서울에 혼자 올라와 살고 있으니 당연히 식사 준비는 내가 해야 하는데, 문제는 미역국이 엄마가 끓인 맛이 나지 않았다. 내가 요리에 소질이 없는 탓도 크다.


왜?

다시다도 넣어보고 사골육수 조미료도 넣어보고, 센 불에 끓여도 보고 별별 시도를 다 해봐도 실패다. 엄마가 끓여준 말랑말랑한 미역국은 대구에 가야 먹을 수 있는 걸까. 내가 끓인 미역국은 왜 그리 질기고 미역이 큰지. 엄마는 나랑 다른 미역을 사서 끓이나?


대구에 내려가서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 맛이 나지 않는다고. 뭐뭐 넣어야 돼? 하니 미역국엔 특별한 게 들어가지 않는단다. 심지어 다시다도 안 넣는다고.

그럼 뭐 넣어?! 내 미역국은 안 말랑말랑해!

미역국은 한번 끓이고, 또 식으면 다시 끓이고, 간을 보면서 여러 번 끓여야 말랑말랑하게 맛있는 미역국이 된단다. 엄마는 귀찮아도 그게 제일 맛있다고. 그래서 그렇게 끓인다고.




아. 미역국 하나에도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구나.

몰랐다.

유독 말랑말랑한 미역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여러 번 끓여낸 미역국은, 엄마의 사랑이었구나.

가끔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항상 내어주던 미역국은 가장 끓이기 편해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본 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겠지.


이번 연휴에는 집에서 먹는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먹었다. 엄마는 좀 싸갈래? 했지만, 그냥 다음에 또 와서 먹겠노라 했다.

같은 음식이라도 자취방에서 먹으면 이 맛이 안나거든.


미역국 먹고 싶다는 핑계로 또 대구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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