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기억 2

흩어진 육 남매의 고슴도치 같은 시간들

by 변송자


위암을 선고받은 엄마는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모두 엄마의 몸과 영혼, 그리고 청춘이 녹아 흘러온 결과라는 것을.

그래서 엄마는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위인 같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늘 안쓰러운 존재였다.

그녀의 죽음은 슬픔이었고, 아픔이었고,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욕구와 안위 같은 것은 오래전에 포기해 버린 여자 사람!

엄마에게 삶의 전부는 오직 자식들의 행복뿐이었다.

그런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 속에서 비난의 화살은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결국 그 화살은 시어머니를 시어머니처럼 대했던 새언니에게로 향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오빠는 절연을 선언했다.

홧김에, 슬픔에, 배신감에… 아주 차갑고 짧은 말로 동생들과의 관계를 끊어냈다.

동생들은 그런 형이 너무 야속해 더 크게 상처받았고, 맞절연으로 응답했다.

딸 셋, 아들 셋.

우리 여섯 남매는 엄마의 죽음 이후, 정말 말 그대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는지를.

엄마 없는 어른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천애고아처럼 느껴졌다.

명절 전날 저녁, 시댁을 다녀와도 찾아갈 친정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찾아간다 해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더 서러웠다.

엄마 말대로 아버지는 고생은 하셨지만,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충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 필요 없다.”

“나는 혼자 살겠다.”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결핍으로 똘똘 뭉친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


가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그 빈자리를 엄마와 장남인 오빠가 대신 채우게 되었다.

엄마는 사실상 혼자서 가정경제를 책임졌고, 은행에 취업한 오빠는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며 아버지의 역할까지 떠안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빠는 늘 ‘형’이 아니라 ‘어른’이었다.

엄마에게 오빠는 아들이면서도 남편 같았고, 동시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

엄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오빠가 퇴근할 때면 전화를 해서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자고 했거든.

같이 걸어오던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난 이후부터, 오빠는 내게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가끔 엄마에게 무심해 보일 때가 있어도,

‘그래도 우리 엄마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서운함은 고마움으로 방향을 달리 했다.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여파는 결국 모두에게 미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집을 보며 배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가 지쳐있었고 결핍이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아닌 다른 형제를 보며 서운함을 넘어선 배신감만 키우고 있었다.

나 또한 절연을 선언한 오빠가 야속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빠를 위해서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정과 방법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그동안 짊어지고 살아온 삶의 무게를, 이제는 조금쯤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오빠는 중학생 때부터 이미 어른 같았다.

집안 어른들도 장손인 오빠를 어른 대하듯 했고,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또래처럼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고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은행에 취직해 가정을 책임지는 길을 선택했다.

동생들을 끔찍하게 아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들은 ‘형’의 말을 거의 법처럼 여기며 따랐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여섯 남매의 우애를 부러워할 정도였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뒤 그렇게 풍비박산이 나버렸으니

그 상처는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시간들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잘 살아보자.’

‘세월이 흐르면 상처도 아물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볼 날도 오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시간을 버텼다.

우리는 거의 10년 동안,

가까이 가면 찔릴까 봐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고슴도치처럼 살아왔다.

나는 오빠에게 말했다.

“누가 뭐래도, 오빠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이젠 오빠랑 오빠 가족만 생각하고 살아도 괜찮아.”

그 말이 오빠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못했었나 보다.

가끔 만날 때마다 성당을 다니며 종교의 힘을 빌려 상처받은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를 추억하자니

엄마가 가장 사랑했으며, 엄마의 삶에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엄마의 장남인 오빠에게로 이어졌다.

결혼을 조금 늦게 한 것 말고는 늘 엄마의 자랑거리였던 오빠였기에 육신의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하던 엄마의 마지막 순간에도 오빠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안쓰러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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