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때문에…….”
“저는 하루에 10시간을 걸어다녀요. 배달 일을 하거든요.”
“…네?”
“그러다보니 여름만 되면 체력이 딸리더라고요. 이렇게 뛰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뭐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개팅이라도 나온 듯한 멘트에 내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쪽을 보는 순간, 느꼈어요. 꼭 물어봐야겠다고. 여기서 그냥 가면 후회할 거 같아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 유부녀예요. 애도 있…….”
“운동화 뭐 신으세요?”
“……?”
“너무 가볍게 달리시는 거 같아서…….”
남자가 내 러닝화를 눈짓했다. 가볍게 달려? 운동화? 그제야 그의 목적이 내가 아니라 러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만 끔벅거리다 허… 하며 웃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죽기 살기로 도망쳤단 말인가.
과열되다 못해 미쳐버린 자의식에 민망해 하다 고개를 내렸다. 과연 온갖 먼지로 더러운 신발이 보였다. 5분대… 아니, 4분대로 달려서인지 흙도 묻어 있었고 구정물이 튄 데도 있었다.
동시에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단 자각도 뒤이었다. 오버페이스로 달렸음에도 힘들지 않았던 건 달리면서 느낀 고양감… 그러니까 러너스 하이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위기감인 줄 알았는데 100퍼센트 위기감은 아니었던 가.
그래서였는지, 남자가 다시 보였다. 거듭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달리기에 진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천천히 말했다.
“새발 1080이요…….”
“네?”
“새발란스 1080시리즈에요. 신발.”
“아…….”
“러닝화 종류 중에 쿠션화라고 하더라고요.”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 내가 말한 상품명을 적었다.
“어쩐지 굽이 높은 거 같았어요. 혹시 일할 때 신어도 될까요? 많이 걸어서 달리기랑 겸하고 싶은데.”
“일상화는 다른 걸 신는 게 좋으실 거 같아요. 저도 남편한테 들은 건데, 러닝화는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하대요. 그래서 일상화, 러닝화 따로 갖고 있는 편이 좋다고.”
“그렇군요.”
“하루 정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네에."
“이 모델 말고도 아다다스 에스엘 시리즈랑 나이스 보메로도 좋대요."
정신을 차렸을 땐 휴대폰으로 런닝화를 검색한 후 남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후카라는 모델인데... 아삭스 시리즈도 이뻐요... 이어진 설명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유명하다는 것들을 함께 구경했다. 너무 집중해 넘어질 거 같을 땐 나무에 몸을 기댔다. 사람들의 휴식을 책임져주는 등나무 주변에는 혹 남자가 살인범일 경우, 휘두를 생각으로 봐뒀던 자갈도 놓여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런닝화의 현실과 미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까지 대화를 이어간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검색해볼게요.”
“네, 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당.”
어느새 당당체까지 쓰며 히죽 웃었다. 남자 또한 고개를 숙인 뒤 타닥타닥 멀어졌다. 작아지는 뒷모습을 배웅하는데,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살가운 성격이었지.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 먹고, 업무상 거북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엔 에둘러 조심스레 전달하는. 상대가 불편해할까 줄곧 신경을 썼고, 치하 한 마디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렇듯 내 딴엔 친절이라고 생각한 장점이 호구라는 단점이란 걸 알았을 때… 나의 배려가 상대의 권리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성격이 변했다. 그 스트레스가 병이 되었다고 확신했을 땐 더더욱.
그런데 그랬던 내가 온갖 주접을 떨면서까지 남자의 질문에 호응했던 것 같았다.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나는 신발 앞코를 쿡쿡 찍었다.
그래, 나는 현실에 있어. 과거가 아니라 여기 발 딛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뒤에는 그에게 휘두르려했던 자갈 또한 사람들 발에 치일까 옆으로 밀어놓았다.
“뭔가 기분이 좋기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에 슬슬 시동이 걸렸다. 골인 지점까지 단숨에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 발을 내디뎠을 무렵, 아이들 무리가 내 앞을 지나갔다. 아까는 노란 병아리더니 이번엔 민트색이었다. 가을철이라 소풍 들을 온 건가. 나는 아이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멈춰 섰다. 그리고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바가지 머리를 한 남자아이가 히 웃었다. 기실 발음이 안 되어 안뇽하떼여로 들렸다. 당황한 나는 눈만 깜박거리다 웃고 말았다.
“네, 안녕하세요.”
내 인사가 재밌었는지 아이가 선생님을 향해 자랑을 했다. 손생님, 저 인사해떠여. 선생님은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명랑한 환담이 이어지는 동안, 아이들은 호숫가에 도착했다. 나는 작은 뒤통수들을 보며 다시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도움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도움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건 살인범이라고 착각했던 남자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신발에 대해 물어 답해줬지만 실은 내가 그로부터 따뜻한 온정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그로인해 과거의 나 또한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린 건지도.
나는 신에게 물었었다. 왜 인간 따윌 만들었느냐고. 동식물만 있어도 충분한데 어째서. 그런 내게 신은 오늘 만난 사람들로… 천사들로 답해준 것 같았다.
잠시 뒤, 나는 천천히 달렸다.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바람이 좋았다.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기다려준 나나와 나순이에게도 인사했다. 너희가 힘을 줘서 달릴 수 있었다고. 달리다 보니 너희 같은 천사들도 만날 수 있었다고도. 나나와 나순이가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하늘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들의 응원에 기분 좋게 호응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