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가 만난 천사(1)

by 잠뽀

<오우가>라는 시조가 있다. 귀양 간 양반이 자연물을 친구라 생각하고 지은 건데, 대략 친구는 다섯이다. 돌, 물, 소나무, 대나무, 달 등.

너 돌, 너는 변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으냐. 너 물, 너는 한결 같으니 얼마나 좋으냐 라는 식이다.


당연히 혈기 왕성한 고딩 시절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자연물과 친구라니, 극 i 였나 보네, 라면서. 대충 시험에 나올 것만 체크하자. 나는 내 친구 신화 옵하들 보러가야 하니까♡


그랬던 내가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신화 옵하들은 커녕 사람이라면 진절머리를 내는 염세주의자가 되었다. 수많은 고통과 역경이 날 우울증 환자로 만들었다. 전전반측을 10년 동안 이어가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단 필사의 각오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집 앞 공원에 있는 자연물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오우가>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정말 그건 최고의 시이자 인간에 대한 통찰이었다. 묵묵한 자연물을 찬양했다는 건 그만큼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한 인간이 최악이란 뜻이었다. 깨달음은 자연물을 접하면 접할수록 짙어졌다. 그런 전차로 나는 오늘도 공원에 나갔다.


“안녕, 나나! 오늘도 이쁘구나. 저기 나순이는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네?”


천천히 뛰며 나무 들에게 인사했다. 쉘리, 알렉스라고 지어줬으나 윤선도 때문에 한글로 바꿔줬다.


“호수에 떠 있는 오동이도 반갑다. 혹시 어제 봤던 그 오리니? 아님, 걔 친구?”


오동이는 답하지 않았다. 유유히 물 위를 나아갔을 뿐. 굳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예를 들지 않아도 자연을 보면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해하고 이쁜 것들이 스스로 생겨났을 리 없을 테니. 모르긴 몰라도 창조주가 어마어마한 계획을 가지고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자 자연물 외에 다른 광경도 보였다. 병아리 떼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란색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 손에 손을 잡고 선생님의 인도를 받아 걸어가는 모습은 아무리 인간 혐오에 시달리는 내게라도 이쁠 수밖에 없었다.


“어휴, 어휴…….”


절로 올라가던 입꼬리는,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임신 걱정 때문이었다. 우울증 환자이면서도 임신 가능성을 완전히 놓을 수 없던 나였다.


“…일단 뛰자. 뛴 다음에 생각하는 거야.”


천천히 뛰던 속도를 높였다. 7, 8분 페이스에서 5분대로. 머리가 복잡할 땐 뛰는 게 상책이었다. 역시 효과가 있었는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듯 더 속도를 높여 호숫가를 지나가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30대 초반 쯤 되었을까. 작고 왜소한 남자가 자꾸 날 쳐다봤다. 착각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도 시선이 느껴졌고 다시 마주보면 어김없이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쳐다봐.’


선크림 범벅에 땀을 육수처럼 흘리는 내가 예뻐서 일리는 없을 테고 뭐 거슬리는 거라도 있나.


그러나 처음 본 사이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여 나는 뭘 보냐는 식으로 남자와 계속 아이컨택을 했다. 그러다 이상한 놈한테 걸려 몹쓸 짓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으나 우울이 남긴 슬픈 흔적이었다.


상대 남자도 비슷한 평지풍파를 겪은 건지 집요한 주시를 이어갔다. 이건 뭐 두근두근 눈빛 교환도 아니고 이상한 기 싸움이었다. 다행히 스쳐 지나갔지만 뒤통수에 들러붙는 시선이 따가웠다.


씨바, 돌아보기라도 해야 하나 라며 미간을 찌푸렸을 즈음, 다다다 발소리가 울렸다. 점점 커지는 달음박질 소리는 날 겨냥하는 것 같았다. 맹수가 초식동물을 추격하듯 가열한 기척에 본능적으로 그 남자라는 직감이 들었다.


‘뭐, 뭐야 왜 따라와. 꼬라봤다고 따지러 오는 거야? 때리기라도 하려고?’


무서워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괜히 쳐다봤단 후회가 그제야 들었다. 이상한 놈한테 걸리는 날이 오늘이었던가.


‘아냐, 키도 작고 몸도 왜소했잖아. 범죄자일리는…….’


그러나 사람을 열 명이나 죽인 정남규도 왜소했다고 했다. 범죄를 저지르는데 덩치가 크고 작고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급해진 난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오늘따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엔 사람들로 차고 넘치더니만 왜… 울상이 된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죽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되뇌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살려줘! 살려… 줘… 흐엑… 흐…….’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범죄자에게 따라잡힌 순간.


“죄송합니다. 뭣 좀 여쭤봐도 될까요?”


아악! 아아악! 나는 눈이 뒤집혀 비명을 질렀다.


“도무지 불러도 답을 안 하셔서……”


놔, 놓으라고, 이 살인범 새끼야!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 육두문자는, 그러나 스르르 사라졌다.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죄송해? 불러도 대답을 안 했다고? 그러고 보니 저기요, 저기요오! 잠시만요! 라는 외침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행색이 보였다. 녹초가 된 몰골 위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범죄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건실한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미역줄기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숨을 터뜨렸다.


“뭐, 뭐예요…….”


뭣하면 뚝배기를 깨버릴 생각으로 땅에 굴러다니는 자갈을 눈여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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