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퇴사록

10년차직딩의 쉼표, 퇴사록

쉼표를 찍다

by 우노

하던 일에 적잖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던 아내가 먼저 쉬어가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무려 40일간의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2015년 8월, 퇴직의사를 팀장에게 전했고 두달여간의 인수인계를 한 뒤, 2015년 10월 1일부로 회사에선 종지부를 내 삶에선 쉼표를 찍었다. 대책따위는 없었다. 왠지 완벽한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강박이 퇴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 베른 @2015
그렇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은 진리다.


만 10년 셋톱박스 개발자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와 아들과 함께한 시간이 절반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해외출장, 야근이었다. 한창때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바로 인도행 비행기를 탔으며 아들이 태어난 날로부터 일주일 후 어느나라론가 떠나버렸다. 남들은 속도 모르고 해외출장 많이 가서 좋겠다는 소리도 하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로 인해 업계에선 이혼소식들이 적지않게 들여오곤 한다.


스위스 베른 @2015
그리고 아내와 나는 다섯살 아들과 함께 뒤도 안돌아보고 유럽으로 70여일간 여행을 떠났다.


"하루가 멀구나!" 라고 외치며 변화해대는 기술에 불안해하며 만족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언제나 양산일정에 쫓기다 보니 꼭 붙들어두었던 내 가슴속 설레임은 조금씩 나를 뿌리치고 있었다. 열정은 사라져버리고 열정없는 빈껍데기 개발자로 몇년째 살아가며 이 괴로움을 아내에게 밤 늦도록 뱉어내곤 했다. 촉촉함을 잃어버린 나에게 아내는 매일매일 힘드면 그만두고 우리만의 시간을 얻어보자며 다독여주고 여행을 제안했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다섯살 아들과 함께 뒤도 안돌아보고 유럽으로 70여일간 여행을 떠났다.


네덜란드 호헤벨루베 국립공원 @2015
새장 속에서 길들여진 작은 새는 새장 밖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70여일간의 여행은 거짓말처럼 빨리 흘렀다. 잡아두고 싶었지만 그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했다. 여행이 끝나고 2주가 지난때였다. 여전히 아내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야기해주지만 나는 조금씩 엄습해오는 불안함을 밀쳐내지 못했다. 아무런 대책없이 직장을 그만 둔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무엇을 잘하는지도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새장속에서 길들여진 작은 새는 새장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새장 밖의 세상은 흐릿했다. 그래도 이 두려움속에서 개발자의 길로 다시 들어서고 싶진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느날, 조급함에 성급한 결정으로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이 되는지 아내는 웃는 얼굴로 천천히 긴 호흡으로 생각해보자고 한마디 건네주었다.


스위스 베른 @2015
퇴직금 아직 남았잖아. ^^


대책없이 퇴사를 결정하였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이 '쉼'의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나의 몫이다. 새로운 환경으로 건널때의 시간투자는 필수이다. 적응을 위한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면 새로운 환경, 새장 밖으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온갖 잡생각, 불안의 시간들은 반드시 나에게 찾아올 것이고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시간의 터널이다. 누구라도 겪었을 혹은 겪게될 이 시간들을 먼저 부딪히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나는 이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경청하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그릇된 선택이 아니었슴을 나아가 그릇된 길을 가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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