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숙소가 털렸다. 그리고 미드에서만 보던 CSI가 찾아왔다.
마흔의 문턱에서 대책 없이 퇴사를 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 생활비로 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우리 가족은 69일 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네덜란드에서 한 달 그리고 스위스에서 한 달을 살았다. 이러는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아내가 내게 건네준 한마디뿐이다.
"10년 넘게 쉬지 않고 일했잖아. 이제 좀 쉬어도 괜찮아"
네덜란드 한달살이 5일이 지났다. 암스테르담에서의 그림 같은 이틀을 보낸 뒤, 네덜란드의 숨겨진 보석 같은 마을, 티엘에서의 사흘째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번잡하지 않은 동네이며 목장이 많고 무엇보다 월세가 싼 곳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마을이었다. 티엘에서 구한 한달살이 보금자리는 방 2개에 전실, 멋진 다이닝룸에 복층구조로 된 집이었다. 월 80만 원치고는 꽤 괜찮았다.
아보카도의 역습
그렇게 우리 가족은 대책 없는 퇴사는 새까맣게 잊은 채, 네덜란드의 행복한 한달살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행은 심심하면 죄라고 했던가, 겨우 이 5일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꽤나 스펙터클한 사건을 두 개나 맞이하게 된다. 아내는 암스테르담에서 그 몸에 좋다는 아보카도가 매우 싼 가격에 판매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과일을 매우 사랑하시는 아내님 왈,
"아보카도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 아보카도 베이비라는 동화책도 있잖아! 우리나라는 비싸서 못 사 먹어!"
라며, 앉은자리에서 아보카도 두개를 통째로 까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보카도를 먹고 천하장사가 된 아보카도 베이비처럼 힘을 불끈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에너지가 솟구치게 하는 과일이라서 그런지 아내는 이날 저녁 그 에너지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아보카도 색깔을 가진 어벤저스의 헐크가 변신하듯 온몸이 울긋불긋 솟아올랐다. 과일을 매우 사랑하시는 아내님 다시 왈,
"으아~~~~!!! 우라질 레이션!!! 아보카도~~!!! 다시는 안 먹어!!!!"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아내는 마트에서 아보카도가 눈에 뜨이면 안전거리 5미터를 유지한다.)
괴물이 된 아내를 옆에 앉히고, 뭔 일이 일어난 건지, 급하게 검색을 했다. 검색과 동시에 쏟아내는 아보카도에 대한 알레르기 경고 문구들.
"아보카도는 조금씩 먹어야 합니다.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심할 경우 생명을 위협?!"
아내는 전날보다 더 퉁퉁 부은 몸을 싣고 1시간을 달려 겨우 티엘에 도착했다. 읍내에서 약 파는 곳을 찾아냈지만 설명하기가 어려운 상황. 아내는 급했는지 퉁퉁부은 몸을 약 파는 점원에게 보여준 뒤,
"아보카도!"
라고 외쳤다. 점원은 알았다는 듯 급하게 약 한통을 골라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허겁지겁 약을 먹었고 몇 시간 후 거짓말처럼 두드러기는 숨을 죽였다. 아내는 이제 살만했는지 왈,
"역시 내가 약발은 잘 받는다니깐."
(진짜로 아내의 약발은 세계 최고다.)
두 번째 사건은 메가톤급이었다. 티엘에서 사흘째 되던 날, 우리 한달살이 숙소가 도둑에게 털렸다.
어딜 봐도 수채화 같았던 티엘의 오솔길을 산책한 뒤,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일용할 양식을 사러 마켓에 잠깐 다녀온 사이, 창문이 똭!
시골마을, 빈집털이를 당하다
노트북 두대가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여권과 현금은 그대로 있었다. 창밖으로 노트북이 보이니 급하게 창문을 뜯고 노트북만 쏙 들고 간 듯 보였다. '커튼을 닫고 갔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위기 속에서도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아내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고 넋 놓고 있는 나에게 집주인에게 전화하라고 얘기했다. 나는 허겁지겁 집주인 에이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에이다, 나 네 집에서 묶고 있는 정이야, 에이다! 도둑이 창문 뜯고 우리 노트북을 홀 랑가 져갔어! 빨리 경찰에 신고해줘!"
"리얼리? 다친 데는 없어? 전엔 이런 일이 없었어! 언빌리버블! 바로 경찰에 신고할게"
30여 분 후, 네덜란드 경찰 두 명이 도착했다.
남자 경찰은 영화배우 누군가를 닮았고 여자 경찰은 그냥 거인이었다.
"뭐 잃어버렸어? 왔을 때 집 상태가 어땠어?"
"어, 원래 빵 봉지가 여기 위에 있었는데, 밑바닥으로 내동 이쳐있었어, 봉지는 사라졌고, 아마도 봉지에 노트북을 담아갔나 봐"
영화배우와 거인은 한참을 메모했다. 다행히 우리는 여행자보험을 들어놓았기 때문에 경찰의 사건 리포트만 있으면 약간의 보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보험 처리하려면 사건 리포트가 필요해"
"다음 주 월요일에 사건 보고서 우편으로 보내줄게. 그리고 내일 CRIME SCENE부서가 올 거야, 어쨌건 외출 시엔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쳐야 해"
이때. 이웃집 아저씨가 다가왔다.
"어이, 너네도 털렸어?"
"네, 창문 뜯고 들어왔어요"
"나랑 똑같구먼. 방법도 똑같아"
이웃집 아저씨에겐 죄송했지만 난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저씨에겐 표 나지 않게. 사실 우리가 여행객인 것을 알고 감시하고 있다가 표적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불안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아내 또한 안심이 되는지 초조함을 내려놓고 '놀아줘'라고 징징대는 아들님과 함께 뒤뜰에 가서 놀기 시작했다.
미국? 네덜란드 CSI가 오다
다음날 오전, 손님이 있을 리 없는 우리 집에 벨이 울렸다.
"CRIME SCENE 부서에서 왔습니다."
정말 미드 CSI에서 나왔을 것 같은 나이 지긋한 베테랑처럼 보이는 할아버지가 007 가방을 들고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는 멋진 수염을 매만지시며 신분증을 보여준 뒤 바로 지문채취를 시작하셨다.
"찾았다. 이웃집 창문에서 나온 지문과 똑같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짚은 손가락 보이지?"
"그럼 도둑놈 잡을 수 있을까요?"
"확률은 높아졌지. 근데 노트북은 못 찾을 거야"
빈집털이 사건 이후 우리는 외출할 때마다 중요한 것들은 가방에 넣어서 항상 들고 다녔다. 노트북은 여행자보험을 들었으니 경찰한테 받은 사건 보고서만 있으면 보상받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남은 두 달을 노트북 없이 어떻게 살지였다. 아들을 위한 동화도 들려줄 수 없었다. 사진을 옮길 수 없는 건 더욱 큰일이었다.
죽으란 법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만 죽으란 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 또한 죽으란 법은 없는지 친구 녀석이 8일 후에 휴가를 내고 네덜란드로 놀러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친구에게 중고 노트북을 공수받을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스마트폰으로 여행기를 작성하느라 손가락에 마비 오는 줄 알았는데 8일 만에 노트북을 받고 자판으로 타이핑을 했던 그 순간의 짜릿함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가족의 여행은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아들에게 네덜란드 도둑이란
그리고 아들은 한동안 머릿속에서 도둑이 떠나질 않았다. 네덜란드의 어느 한적한 도시로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면 다섯 살 아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물었다.
"아빠, 우리 집에 갔을 때 도둑이 들어와 있으면 어떡해?"
"집이 잠겨있어서 도둑이 들어가 있을 수 없어."
"아빠, 집이 잠겨있어도 창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잖아"
"그럴 수 있는데 경찰이 왔다 가서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그래도 다시 오면 어떡해?"
"안 온다고 인마......"
창문 부수고 노트북을 훔쳐간 네덜란드 도둑이 아들의 머리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 잊을 만하면 아들은 도둑 얘기를 꺼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아들이 무서워한다기 보단 장난칠 목적으로 꺼내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 가족이 겪은 네덜란드 한달살이 도둑사건은 안 좋게 생각하면 한없이 안 좋을 수 있었던 대형사건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내는 침착하게 대응했고 결군을 안심시켰으며 경찰이 왔을 때도 신기하리만큼 그 상황을 즐겼다. 여행의 작은 해프닝 정도랄까. 나는 집주인과 연락하며 경찰 조사, 여행자보험을 위한 경찰 리포트, 창문수리 등등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집주인은 티엘까지 직접 오진 않았지만 세세한 것 하나까지 물심양면으로 성심성의껏 도와줬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해서 악성 후기를 걱정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여행 역사에 커다란 추억(?)을 선물 받았다.
얼마 후 중고 노트북을 들고 휴가차 놀러 온 친구 녀석과 벨기에 브뤼셀에 다녀오면서도 결군은 어김없이 도둑 이야기를 꺼냈다.
"도둑은 왜 우리 노트북을 가져간 거야?"
"도둑이 다른 집에도 갔어?"
"도둑은 왜 우리 집으로 온 거야?"
"도둑은 괴물같이 생겼어?"
도둑에 관한 질문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랬다. 어느덧 그 네덜란드 도둑놈은 아들의 놀이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행이 끝난 훗날 '아들이 이 여행을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도둑놈만큼은 기억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들아, 우리는 다시는 오지 않은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는 거란다.
우리 이 소중한 순간들, 온전히 즐기자.
너의 기억 속에 오래 있진 못하더라도 즐거웠던 그 마음만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