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잊고 싶지 않았던 스위스의 그 풍경 속에서 한 달을 살았다
마흔의 문턱에서 대책 없이 퇴사를 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 생활비로 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우리 가족은 69일 동안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네덜란드에서 한 달 그리고 스위스에서 한 달을 살았다. 이러는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아내가 내게 건네준 한마디뿐이다.
"10년 넘게 쉬지 않고 일했잖아. 이제 좀 쉬어도 괜찮아"
벌써 10년 전이다. 나는 독일 월드컵 개최 열기로 한창이던 20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에쉬본으로 3개월 동안 장기출장을 가게 되었다. 입사 2년 차만에 3개월 독일 출장이라니 난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고민이 있었다. 그 당시 난 아내와 양가 부모님 합의 하에 결혼식은 올리지 않은 채로 동거를 하고 있었고 회사 내규는 오직 합법적인 부부만이 지원을 받고 함께 갈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이 고민은 연구소장을 통해 임원의 귀에 들어갔고 나는 기적적으로 아내의 동반 출장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아내의 비행 비용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부부의 첫 장기여행을 더욱 흥분시켰다. 이처럼 명문대학교를 나오지도 특출 난 재능을 갖지도 않은 나는 운 좋게 얻은 짜릿한 기회로 사회생활의 포문을 열었다. 이 때문인지 지금까지 적절한 기회를 계속해서 얻을 수 있었고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되었다. 비록 10년이 지난 지금, 결국 하던 일에서 더 이상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퇴사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그래도 절망적인 퇴사가 아닐 수 있었던 이유는 입사 초기에 운 좋게 얻었던 독일 장기출장의 기회처럼 10년간 알게 모르게 나에게 왔던 행운들, 고난 뒤에는 반드시 찾아왔던 웃음들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중에서도 아내의 지지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아내와 함께했던 독일에서의 장기출장은 일하러 가는 것 일뿐 놀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놀러 간다는 말은 우리 부부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평일에는 밤낮없이 일만 했다.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할 수 없어 숙소에서 밤을 새우며 일하는 건 다반사였다. 적지 않은 시차에 한국과의 협업은 엄청난 피로를 몰고 왔다. 그럼에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주말에 아내와 함께 독일 인근 국가들을 여행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소꿉장난 같았던 독일의 일상 속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러 다녔다. 매주말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갈지 계획을 세웠다. 아내와 함께 독일을 둘러싼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모든 순간을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그 후 10여 년이 흘렀다. 바삐 돌아가는 한국사회의 한 톱니로 맞물려 돌아가는 삶은 그 당시 담아놓았던 최고의 순간들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히 힘든 삶이었다. 가정의 평화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장기출장업무(실제로 이로인해 동료가 이혼에 이르는 사례를 봐왔다), 야근없이는 끝낼 수 없는 프로젝트, 회사에 연관된 모든 것들이 망각의 늪에 나를 가두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딱 하나, 딱 한 순간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거 기억나?'라고 어림잡아 물으면 아내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잊지 못하는 그 순간을 아내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 장면, 그 설렘, 아내와 나누었던 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 요흐로 올라가는 산악열차 안에서 보았던 그 풍경이 우리 부부에겐 평생 잊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곳에서 한 달쯤 살아봤으면 좋겠다"
"관광 와서 며칠 묶는 것과는 많이 다르겠지?"
"모두가 아는 곳이지만 한 달쯤 살아보면 바쁘게 움직이는 시선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거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풍경에서 한 달만 살아볼 수 있겠지?"
퇴사 후, 아내와 나는 잊고 싶지 않았던 10여 년전의 그 풍경 속에서 한 달을 지내기로 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야 기억의 시선이 닿지 않던 곳에 내 마음은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심연엔 참 많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퇴사는 그 심연에 봉인되어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낼 수 있게 해주었다.
네덜란드의 시골마을에서 한 달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은 스위스로 향했다. 겨울 앞에 선 가을은 유럽 가을 하늘의 푸르름을 재빨리 거두어갔다. 오후 4시면 붉은 노을이 부끄럽게 알프스의 능선을 수놓았다. 생갈렌 지역의 빌트하우스에는 캄캄한 어둠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도착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의 한달살이처럼 스위스 역시 생갈렌의 깊숙한 산속 마을에서 하기로 했다. 달빛이 간혹 얼굴을 내미는 캄캄하고 깊숙한 산속을 오래된 자동차로 구불구불 내달렸다. 해발 1000미터 정도 올라가서야 숙소에 도착했지만 주변에서 빛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짐을 내동댕이치고 우리 가족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침실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눈을 비비며 게으른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현실은 먼저 일어난 여섯 살 아들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배를 밟는 바람에 "악!"하고 외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거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커튼을 힘껏 쳤다. 나의 눈에 들어온 거대한 초록의 풍경을 보는 지금 이 순간이 10년 전 아내와 내가 염원했던 그 순간임을 직감했다.
'드디어 한 달만 살아봤으면 했던 그 풍경 속으로 들어왔구나'
집 앞에 설산, 뒤뜰에도 설산, 옆길은 초록초록 풀밭에서 풀 뜯는 소들로 가득한 그런 동네였다. 주말이면 독일, 스위스 도심에서 하이킹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 한적함 그 자체인 마을이었다. 집 뒤로 보이는 커다란 돌산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방금 베어낸 따끈따끈한 나무들을 싣고 내려오는 지게차를 보기도 한다. 지게차를 보며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니 스무 살 갓 넘은 듯한 앳된 아가씨가 운전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가을과 겨울의 길목 즈음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12월 초까지 이곳에서 눈을 보고 갈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겨울이 오긴 오는 거야?'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날은 따뜻했고 설산 꼭대기의 얼마 남지 않은 눈들은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만난 세르비아계 스위스 친구는 우리들의 의문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알다시피 눈이 잘 안와. 나도 여기서 10년 이상을 살았지만 올해는 언제쯤 눈이 올지 잘 모르겠어. 행운을 빌께. 이곳을 떠나기 전에 설산을 꼭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빌트하우스에 도착한지 열흘이 지났을 즈음, 하늘의 구름이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가 원하는 눈을 잔뜩 머금고 있는 듯 두텁게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이날 저녁, 잠이 들기 전 아들은 내게 속삭였다.
"아빠, 내일 눈 오는 거 아냐? 왠지 올 거 같아 아빠. 오면 눈싸움하자"
다음 날 아침, 빌트하우스는 설국이었다. 하루아침에 녹색 왕국이 겨울왕국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그칠 줄 몰랐다. 족히 1미터는 넘게 내리고 있는 듯 보였다. 아들과 나는 '신난다'라고 외치며 한참을 좋아라 했다. 나중에 이 눈이 우리 가족을 고립까지 시키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해발 1000미터의 마을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신비스러운 풍경을 마주할 때도 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1000미터에 위치한 빌트하우스는 기온이 낮아 눈이 내린다. 하지만 차를 타고 마을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내리는 눈이 녹으며 비가 되어 내리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눈과 비의 그 경계에 다다르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환상적인 설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완만한 초록 능선의 반은 하얀 옷을 나머지 반은 초록 옷을 입었다. 차를 세우고 아내와 다섯 살 아들 그리고 나는 말을 잊은 채 이 신기한 광경에 흠뻑 빠졌다.
퇴사 후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시대에 나 역시 그렇게 가족과 함께 69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조금 다르다면 이곳저곳 짧게 옮겨다닌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한 달, 스위스 한 달씩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10년 전, 기억의 시선이 닿지 못했던 그 오래전 바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이뤄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퇴사는 나에게 돈만 앗아갔을 뿐 인식하지 못하는 소소한 변화들을 포함해 많은 선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