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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n 04. 2016

장미 한 송이가 알려준 기념일

장미 한 송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저녁 10시 늦은 귀가 길, 산본 지하철역 앞 건널목이 분주했다.


"꽃이요! 꽃! 한송이 이천 원!"


당장 내일이라도 꽃들이 모두 시들어 버릴 것처럼 백발의 꽃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간곡한 목소리에 발걸음이 망설였지만 이내 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10미터나 지났을까.

바로 앞을 지나갈 때도 맡을 수 없었던 장미꽃향이 10미터쯤 지나쳐가자 꽤나 진하게 나의 후각을 자극했다. 장미꽃이 마치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뒷걸음질을 쳤고 

아내에게 아침에 받은 이틀 치 점심값 만원 중 

오늘 점심을 먹고 남은 오천 원을 지갑 속에서 꺼내었다.


"장미 한 송이만 주세요~!"


가냘픈 장미 한 송이를 품에 안고 마을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각, 마을버스 안의 표정들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반쯤 감긴 피곤해 보이는 눈들이 한송이 장미꽃의 향에 이끌려 왔다.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자고 있는 아들이 깨어날까 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엔 전구색 갓등이 은은하게 퍼뜨린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빛에 비추어진 장미는 더 환한 미소를 건넨다. 

얼마만에 건네는 장미던가.

나는 개선장군처럼 아내에게 환한 미소의 장미 한 송이를 살포시 건넸다.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어? 웬 장미?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았어?"

"어? 뭐지? 지하철에서 보이길래 그냥 사 왔는데?"

"오늘, 우리 만나고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손 잡고 동학사 꽃길을 거닐었던 날,

 내 손을 잡고 있던 오빠손에 땀이 흥건했었잖아. 오늘이 우리 처음으로 손 잡은 날이야~"


대학 때였다.

어느 날 학과 친구 놈이 로봇 만든답시고 만날 땜질하고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살던 나를 도서관 앞으로 불러냈다. 그놈 옆엔 아담한 키에 자그마한 얼굴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고 자기 동아리 후배라며 소개를 시켰다.

그 다음날, 친구 놈은 나에게 '그 애 어때? 소개팅 할래?'라고 물었고 나는 단박에 '콜!'했다.

그렇게 그 애와 주말에 첫 만남을 가졌고 얼마 후 동학사 꽃길에서 데이트를 했다.

'손을 잡을까, 말까' 백만 번도 더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덥석 잡았다가 욕먹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결국 난 멍청하게 분위기 없게 그 얘에게 물었다.


"손 잡을까요?"


다행히도 그 애는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잡았다.

긴장이 돼서 땀이 흥건히 고였는데,

손을 한번 떼었다가 말린 다음 잡아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잘 못했다.

그렇게 동학사 꽃길 첫 데이트에서 아내와 나는 땀이 흥건한 채로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맞다.

우리가 그때 그랬었다.

땀이 줄줄 흐르던 맞잡은 손.

정확히 14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던 거다.   


늦은 저녁, 지하철 역 앞 장미 한 송이가 내게 알려준 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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