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미야코 《차의 맛》
2016년 국내에 한 중국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드라마의 제목은 《랑야방》이다.
위진남북조 시대로 추정되는 가상의 나라 양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사극으로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영상미, 박진감 넘치는 전개,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으로 국내와 중국, 일본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중국의 사극이기에 등장인물들이 차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중 팬들 사이에서 '종주님'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주인공 매장소는 무이암차를 즐겨 마셨고 SNS에서는 종주님이 마시던 차를 파는 가게를 찾아가는 팬들도 생겼다.
극 중에 나오는 무이암차와 개암 과자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차를 마실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다구에 흥미를 보이던 내게 친구가 다구를 선물해준 이후 차를 우려서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다양한 차를 마셔보며 점점 취향이 생기게 됐고 겨울이 다가오니 오래전 겨울 초밥집에서 후식으로 준 차를 떠올리게 됐다.
당시 초밥집에서 후식으로 준 차는 일본 차의 한 종류인 호지차였기에 호지차를 판매하는 곳을 찾아봤다.
호지차를 판매하는 가게 중 잇포도라는 점포가 눈에 띈 이유는 귀엽게 생긴 호랑이 보틀 때문이었다.
검색해보니 교토에서 6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가게라는 정보와 잇포도 6대 점주의 반려이자 공동경영자가 쓴 책이 국내에 번역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와타나베 미야코가 쓴 《차의 맛》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노포(老鋪) 잇포도에서 일하며 사랑하게 된 차와 차 문화, 그리고 차 가게 잇포도와 차를 마시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챕터 하나하나가 짧고 문체 또한 잔잔하기에 잠자기 전 읽기에도 좋다. 가끔 웃음을 자아내게 하거나 귀엽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차란 국숫집이나 스시 집에서 내어주는 공짜로 계속 마실 수 있는 음료와 같지요. 쇼와 60년(1985년) 무렵 캔에 든 녹차 음료가 시중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이제야 일본 차도 돈을 주고 사 먹는 시대가 왔네."하고 반쯤 비꼬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와타나베 미야코, 차의 맛, 송혜진 옮김 (서울: 컴인 2019), 잇포도에 대해서 다방 '가모쿠(嘉木)' , 88-89p
라는 잇포도 6대 점주의 이해가 가는 빈정거림이나
뜨거운 것을 잘 만지지도 못하는 우리 '고양이 혀' 아들에게 조금 두께가 얇은 찻잔을 주게 되면 난리가 납니다. 우리 집에서는 이것을 '고양이 손'이라고 부른답니다.
같은 책 中
같은 고양이 손으로서의 공감
6월에 접어들면 가모 강의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교토 시내에서도 반딧불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모 강 옆으로 흐르는 '미소소기' 강가의 풀숲에 가면 발견할 수 있어요. 어딜 가든 온갖 소리가 넘쳐나는 일상을 살다가 아주 잠깐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놀랄 만치 편안해집니다.
(중략)
수질을 나타내는 '경수(센물)'와 '연수(단물)'라는 단어가 있지요. 일본의 물은 대부분 연수여서, 순하고 물맛이 좋아 일본 차에는 아주 제격입니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수돗물을 염소로 소독하는 과정에서 석회 냄새가 심해지거나 합니다. 이 석회 냄새를 없앨 수 있는 방법으로 주전자에 물을 담고 뚜껑을 연 채로 5분 정도 팔팔 끓이거나 물을 하룻밤 동안 놓아두었다가 쓰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개량된 정수기도 이미 나와 있지만, 차를 우리는 데에 쓰는 물에도 조금은 신경을 써서 차를 맛있게 드셔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 바, 반딧물이야, 이리 와, 그쪽 물은 쓰다고. 이쪽이......" 반딧불이가 좋아하는 물의 맛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요.
같은 책 中
반딧불이의 입맛을 배려하는 저자의 바람 등이다.
오래된 가게의 공동경영자니만큼 차에 대해 엄격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에 대해 손쉬운 접근을 권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상인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반딧불이 일화에서처럼 좋아하는 차를 더 많은 사람이 즐겨주길 바람이리라.
그래서인지 잇포도 점포에서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도 차를 시음하는 기회를 주는 모양이다.
교토라는 보수적인 지역에서 이 가게에서 먼저 선보인 것들이 있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예로는 200g이나 400g이 아닌 100g씩 나눠 팔기, 여름용의 차가운 녹차(그래뉴당을 섞은 차)인 우지 맑은 물(宇治清水) 개발이다.
또한 이전까지는 바깥에서 차를 마시려면 호텔에서 기모노를 입은 직원이 차를 내려주는 값비싼 비용의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잇포도에서는 가게 안에서 손님이 직접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공간을 개발, 저렴하고 손쉽게 차를 접할 기회를 대중들에게 선보였다고 한다.
우지 맑은 물(宇治清水)의 경우엔 20세기 초에 가게의 총무가 여름이 될 때마다 떨어지는 차 가게의 매상을 올리기 위해 찬 음료를 생각하다 개발한 녹차라고 한다.
이 녹차의 개발은 처음에는 잇포도의 대표인 증조부도 몰랐던 일이나 저자가 언급하듯이 총무나 증조부에게 여러모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이 우지맑은 물(宇治清水)이 폭넓게 전파됐으니 시장의 논리가 전통과 고집을 이겨내지 않았나 싶다.
오래된 교토의 차 가게인 만큼 자연스럽게 잇포도와 거래하는 노포(老鋪)들이 소개된다는 점 역시 이 책의 장점이다. 책에 소개되는 노포들이 독자들의 취향과 맞을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새로운 가게들을 알게 되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닐까.
잇포도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가끔 이벤트로 근처의 노포들과 콜라보를 하기도 하니 향후 교토나 잇포도 방문할 사람은 체크하는 것도 좋다.
차를 마실 때의 여러 가지 팁이 소개되는 만큼 자세한 색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잇포도 글로벌 스토어를 이용하면 국내에서도 손쉽게 차를 구매할 수 있다.
저자의 남편이자 6대 점주의 바람대로 차를 돈을 주고 쉽게 마시는 세상이 되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