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천황.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만세일계의 존재이자 신성불가침이라는 메이지 헌법의 조항으로 치장을 한, 이 벌거숭이 임금님의 신화는 천황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는 '인간선언'으로 끝이 난다.
가마쿠라 막부 이래 천황은 정치적 실권을 잃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정치적 필요에 의해 국가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 결과는 제국주의의 일본과 태평양 전쟁의 패배, 그리고 앞서 말한 '인간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천황을 채식주의자들이 노렸다. 그것도 천황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7세기.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투던 시기, 바다 건너 열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스카 시대의 지도자인 덴무 천황은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무려 12세기에 이르는 한가지 정책을 발표한다.
육식 금지령.
살생과 육식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12세기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금주령도 당시에는 술의 매매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고 결국 철폐에 이르렀다.
사실 이 육식금지령을 들여다보면 육식을 완전히 금한 것이 아니다.
덴무 천황의 육식금지령은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식용을 금하는 내용이었다. 이후의 천황들 역시 돼지를 금하거나 가마우지, 사슴, 소 등의 식용을 금했다.
공통적으로는 농경 생활에 필요한 소의 식생을 금했다. 이 오랜 시간에 이른 규정으로 일본인들은 12세기 동안 단백질을 육고기에서 섭취하는 대신 어패류를 섭취하는 방향으로 굳어지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일본의 어패류 섭취는 기존의 식생활과 오랜 기간에 걸친 육식금지령의 영향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축을 먹는 것은 도래인들 즉 기마민족의 식생활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덴무 천황 이후 식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양고기의 섭취를 피했으며 우유의 섭취 또한 생피를 마신다고 믿어 섭취를 피했다. 사냥으로 잡은 들짐승 외에는 먹지를 않았다.
그러면 고기를 어떤 때에 먹었을까?
바로 몸보신용이다. 당시의 ‘보약’이란 약 대신 먹던 고기를 뜻한다.
육식 금지령 이후에도 아스카, 나라 시대에도 보약을 먹었고 에도 시대에는 이 보약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보약으로는 멧돼지와 사슴이 쓰였다.
고기를 먹고 싶었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는 고기가 독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져온다.
오미 지방은 한반도의 도래인들이 정착해 살던 곳이다. 좋은 소를 사육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은 보약을 위해 붉은 반점이 있는 소를 영주님께 바쳤고 멧돼지를 ‘모란’이라 불렀기에 쇠고기는 ‘흑모란’이나 ‘겨울모란’이라고 불렀다.
붉은 반점이 있는 소는 먹어도 천황의 뜻과 달리 몸이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그럴듯한 믿음까지 있었다.
아이들을 속이고 보약이란 핑계를 대고 이름마저 바꾸어 먹는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다. 고기를 먹고 싶었던 자들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먹는다. 나라님도 인간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다. 하물며 봉건제로 변화한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12세기가 흘렀다.
메이지 천황은 서양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어떻게 하면 서양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한 그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인과 서구인들의 체형 차이의 극복이다.
링크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7-19세기 일본인의 평균 신장은 155.1cm으로 인접국인 우리나라보다 6cm 정도 더 작다. 그러나 과연 일본인들이 단백질을 어패류 중심으로 섭취해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는 의문이긴 하다.
메이지 천황은 고기를 먹으면 일본인들도 서양인들을 우러러 보지 않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육식의 해금.
고기를 오랜 기간 ‘보약’이란 이름으로 몰래 먹거나 특수한 경우에 섭취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갑자기 육식을 해금한다 해도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전가의 보도를 꺼낸다. 시식이다.
메이지 천황과 관료들이 먼저 육고기를 시식했다.
그러나 12세기 동안의 믿음을 저버린, 피와 살이 고기로 더럽혀진 메이지 천황을 용납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1872년 2월 18일. 슈겐도의 신도 열 명이 천황이 기거하는 곳에 단도와 봉을 들고 잠입해 네 명이 사살되고 한 명이 중상, 나머지는 체포되는 일이 발생한다.
"현재 이방인이 들어온 이후 일본인이 오로지 육식을 하는 고로 땅이 모두 더러워지고 신이 있을 곳이 없음에 즈음하여 (중략) 이방인을 몰아내고 신불과 제후의 영토를 예전과 같이 지켜내야만 한다.”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 정순분 옮김 (서울: 뿌리와 이파리, 2006), 28쪽
위 문구가 이들의 주장이다
신도 열 명이 천황의 거처에 들어가 직소를 하려고 했다. 일반적인 직소라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또한 직소만 하려고 했다면 단도와 봉을 들고 갈 이유도 없다.
이 슈겐도의 신도들은 육식 금지라는 신앙이, 일본인들이 신의 자손이자 당시에는 신이라고 믿던 천황보다 중요했다. 육식을 해금한 천황은 타락한 신의 자손이기에 단도와 봉으로 혼을 낸다는 각오다. 물론 손이 조금 미끄러지면 타락한 신의 자손이 죽겠지만 그건 말을 듣지 않은 천황의 잘못이라는 믿음이었으리라.
이들은 주술을 외우면 활이나 총으로 공격해도 맞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였고 백의를 입고 있으면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그릇된 신앙까지 있었다.
사람이 편식을 하지 않고 골고루 음식을 먹어야 함을 증명하는 예시라 할 수 있다.
고기를 먹어서 자칫하면 천황의 목숨이 날아갈 뻔 했다. 슈겐도 신자들의 거친 설득으로 천황이 고깃덩이가 됐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천황을 암살하려고 한 불경한 이들은 체포됐다. 이제 육식을 장려하려는 천황의 명분이 더 강화됐다.
그래도 오랜 기간 굳어진 식습관을 단기간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육식 요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물고기와 달리 육식이 저렴하지도 않았다. 육고기를 구할 곳도 문제였다.
답은 외국인들이 갖고 있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쇠고깃 집이 생겨나고 쇠고기를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된장과 간장을 이용해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익숙한 조리법으로 요리한 쇠고기전골이 만들어졌고 좀 더 발전한 스키야키가 뒤이어 나온다.
유행에 민감한 이들과 에도의 발전한 상업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이들은 이 ‘힙한 요리’를 한시바삐 사람들에게 내놓아야 함을 깨달았다.
힙스터들은 이 근대 요리를 먹고 소문을 퍼뜨렸다. 요즘 시대처럼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매체가 없기에 먹고 난 이후 주변인들에게 자랑이 필수였다.
고기를 먹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그리하여 육식 해금으로부터 60년이 지나서야 서민들도 즐기는 고기 요리, 돈가스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