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노 가즈아키,《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여름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있다.
러브버그, 모기,
폭염, 태풍, 장마, 에어컨, 바다, 수박, 수영복, 매미 소리, 팥빙수.
그리고 괴담, 귀신이다.
괴담과 귀신.
에어컨과 넥쿨러, 선풍기만큼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단어다.
러브버그가 출몰하고 에어컨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도 사람들은 괴담과 귀신을 좋아했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 증거다.
우리네 평범한 이들은 괴력난신을 말했으니 그 세월만 2000년이 넘는다.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은 곰의 이야기도 상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
귀신은 왜 나타날까.
옛 설화에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세기 야담집인 《청구야담》과 밀양 아리랑 전승에 나오는 아랑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 일화라 할 수 있다.
밀양 부사의 아름다운 딸 아랑은 관노와 짜고 음모를 꾸민 유모에 의해 달구경에 나섰다.
그녀는 성폭행하려는 관노에게 저항하다 끝내 살해당했다. 부친은 낙심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밀양에 부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산발한 채 칼을 꽂고 피를 흘리는 처녀 귀신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했고, 간이 작은 군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간 큰 관리 하나가 다들 기피하는 밀양 부사에 자원해 책을 읽으며 귀신을 기다렸다.
귀신을 믿은 새 부사에게 처녀 귀신은 범인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신임 부사에게 유명한 할아버지는 없었지만 처녀 귀신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그가 귀신의 힘으로 범인을 잡아 처형하니 더 이상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괴력난신을 믿는 일은 공자도 권하지 않은 일인데 신임 부사의 믿음으로 해결되니 오호통재라.
아랑 설화에서 살펴보듯이 쑥과 마늘을 먹고 자란 한국의 귀신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나타난다. 우리네 귀신의 특징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귀신과 죽은 자, 무차별 살인범과 시간 여행을 다루는 단편집이다.
〈두 개의 총구〉와 〈제로〉를 제외한 네 작품은 모두 귀신 또는 죽은 자와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Dead men tell no tales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우리네 귀신이 바다를 건너가 열도 사람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는가. 우리네 귀신이 입을 여는 순간 마늘과 쑥 냄새에 대한 거부감이 공포심을 이겨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은 자에게 왜 입이 있는가.
작가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관용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은 사람을 남몰래 죽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죽여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한다. 사람을 죽여 완전 범죄를 꿈꾼다. 사람을 죽여 여생의 편의를 도모한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과연 마음이 편할까?
귀신은 자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공룡과 벌레가 세상을 지배할 때 천둥 번개, 폭풍우, 무지개, 폭설, 안개, 일식, 화산 폭발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는 기상 현상은 말로 전해지지도 않고 신이 되지도 않았다.
귀신을 말하지 않으니 공룡과 벌레야말로 군자였다.
기상 현상은 기상 현상이었다.
눈과 귀를 잠시 자극하거나 몸에 닿아 사라지거나 그들을 사라지게 했다.
사람이 대지에 서자 기상 현상은 신이 되고 이름이 생기며 말로 전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사람이 원한을 담은 눈으로 살인자를 노려보며 죽어간다.
사람이 공포를 가지고,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한다.
사람이 귀신을 낳았다.
“포로를 산 채로 해부했던 학자들이 미국한테서 거액의 보수를 받고서 당당히 학회로 복귀했다더라."
"설마. 그런 짓을 벌였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텐데."
"그럼에도 태연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이야”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中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귀신의 부름을 받고 귀신을 발견한다.
심리와 심령 사이에서 줄을 타며 나타난다.
작가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능숙한 솜씨로 요리하며 작품에서 선보이고 있다.
심리와 심령 사이에서 독자가 혼란을 느끼게도 한다.
〈아마기 산장〉은 단편집에서 귀신을 다루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태평양 전쟁 후가 배경인 이 소설은 아마기 산장 안으로 독자를 몰아넣고, 흉흉한 산장의 공포와 진실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총구〉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지는 않지만 위기의 고조와 심리 묘사로 결말로 몰아가는 솜씨가 탁월하다.
〈제로〉는 SF 소설이다. 꽤 흔한 소재이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단편집에서 작가의 주요 장르가 아닌 다른 성격의 소설이 있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제로〉는 그렇지 않아 작가의 역량을 말해주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꿈에 나타날 귀신이 무섭지 않다면, 끝을 맞이하는 여름을 시원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면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좋은 선택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