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엔에 가자

한성윤의《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by 백수광부



일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정 일화의 진위를 가리는 코너를 방영했다.

그 코너에서 다룬 일화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외야수 우에바야시 세이지가 고교 시절, 야구부를 그만두려고 한 매니저를 붙잡았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우에바야시는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의 주장이었고 고교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매니저를 붙잡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시엔에 데려가 주겠으니 그만두지 마.”


고시엔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야구만화가 떠오르는 낭만적인 말이다.

우에바야시의 말을 들은 거리의 여성들도 그리 생각했다.

매니저가 절대 그만두지 못하고 우에바야시를 좋아하게 됐으리라고.

지역 대회가 끝나고 고시엔 출장이 결정되자 우에바야시는 매니저에게 그만두지 않길 잘했지? 라고 말했고 매니저는 오열했다고 한다.

청춘을 그리는 야구 만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일화다. 오열하던 매니저와 우에바야시는 사귀지 않았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니저는 남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야구부의 방침상 남학생만이 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

고시엔에 출장한 센다이 이쿠에이 고교는 2회전에서 조소가쿠인 고교를 만나 4 대 1로 패배해 탈락했다. 매니저가 여학생이라면 더 좋았을 이 일화는 사실이었다.


고시엔이 대체 무엇이길래 청춘을 떠올리는 걸까.

고시엔은 크게 두 가지 대회를 말한다.

아사히 신문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 즉 여름 고시엔과 마이니치 신문에서 주최하는 선발 고등학교 야구대회, 봄 고시엔이 있다. 봄 고시엔은 센바츠라 부르기도 한다.

우에바야시의 일화 또는 아다치 미츠루의 《H2》 같은 만화에서 ‘고시엔에 데려다줄게’라고 말하는 대회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시엔은 여름 고시엔을 뜻한다.


여름 고시엔은 47개의 도도부현(학교가 많은 도쿄와 홋카이도는 각각 두 팀)을 대표하는 49개교가 출전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고시엔 구장에서 승자를 겨룬다.

일본 내 4,000여개에 달하는 고교 야구팀들의 지역 예선에서도 단 한 번이라도 패하면 고시엔 무대에 오를 수가 없다. 운과 실력이 모두 있어야 고시엔의 흙을 밟을 수 있다.

봄 고시엔은 이와 다르다. 선발위원회에서 뽑은 팀들이 자격을 얻는다. 가을의 지구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 선발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역 사회에 공헌하거나 미담의 주인공인 학교나 특별한 사연을 가진 야구부 등을 뽑는 ‘21세기 전형’으로도 선발된다.


얼마 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스즈키 이치로는 고시엔에 출전했지만 우승은커녕 1회전에서 탈락했다. 이도류로 유명한 오타니 쇼헤이 역시 고시엔 본선에서 1차전에서 탈락, 흙을 밟는 데 만족했다.


고시엔 본선 진출도 어렵기 때문에 일본의 고교야구 선수들은 고시엔 구장에 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니 고시엔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무겁다.


이제 우리에게도 고시엔이 아주 먼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재일교포들이 설립한 학교인 교토국제고등학교가 작년 고시엔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매 경기 교토국제고 학생들이 제창하는 한국어 교가가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고, 이 모습은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8월 5일부터 시작한 2025년 여름 고시엔에서 교토국제고는 2연패에 도전, 8강에서 탈락했다.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은 고시엔을 다룬 국내 유일한 책이다.

KBS 스포츠 기자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인터넷에서는 쉽게 알지 못하는 정보를 책에 담고 있다.

고시엔=청춘이라는 어른들이 만든 이미지를 어떻게 착취하고 소비하는지도 비판한다.

일본 고교야구연맹 회장에게 들은 한국 야구에 대한 비하 발언은 저자에게 쉽게 잊히지 않은 경험이었다.

'일본 고교야구 관계자들이 유독 강조하는 순수성 또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발언' 이라는 말은 흥미로웠다. ‘외신에게 일본 고교야구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은 관계자들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는 앵무새 역할’ 이란 말은 과거 그들의 발언을 믿었던 자신에 대한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저자가 한국 야구에 가지는 우월의식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취재는 여러 차례 그들의 발언이 사실과 다르다는 경험을 안겨주어 ‘우리나라에서 일본 고교야구가 실제보다 과대 포장되었’ 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대표적인 예가 일본 고교 팀의 장비다. 일본의 ‘고교야구는 상업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는 말과 달리 아무리 봐도 협찬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장비를 학생들이 하고 있다.

고시엔 출장으로 쏟아지는 기부금을 이용해 구매했다는 말과 현실은 다르다.

일본 고교야구연맹이 용품의 무상 제공을 금지했기에 업체는 초저가로 제공한다.

또한 ‘신상품의 샘플링’이라는 명목으로 ‘무상 제공을 금지’하는 규정을 피하고 있다.


편법을 통하더라도 있는 매뉴얼은 없는 것보다 낫기에 긍정적인 면도 소개했다.

어두운 부분이나 불합리한 부분도 조명하고 있다. 고시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문화, 가령 빡빡머리 같은 문화도 왜 야구에만 남아있는지 설명한다.


국내에서도 이제 인터넷으로 고시엔의 중계를 볼 수 있다.

고시엔에 대해 알고 싶은 팬이라면, 이 책을 보며 내년의 교토국제고를 응원하는 것은 어떨까.


2009년 고시엔 하이라이트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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