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장아이링의 단편집 《색, 계》

by 백수광부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장아이링의 단편이 원작이다.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왕지아즈는 애국심이 들끓는 학교 극단의 배우로 친일파 이 선생을 암살하기 위한 미인계 임무를 맡게 된다.

이 선생은 조심성이 많고 능구렁이 같은 사오십 대의 땅딸막한 남자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젊은 여성이 그에게 반했다고 착각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이 선생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부인, 그리고 부인의 마작 동료들과 마작을 칠 정도로 친교를 맺게 되었다. 왕지아즈의 동료들은 처음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도 사이가 어색해져 눈을 맞추기도 힘들어했다.

왕지아즈는 오랜 시간 준비한 미인계의 결과를 거두는 날, 이 선생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그를 탈출시키고 죽음을 맞이한다.


스탠드 불빛을 옆얼굴로 받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어 속눈썹이 수척한 뺨에서 쉬고 있는 미색 나방처럼 보였다. 지아즈는 그런 표정이 부드럽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갑자기 밀려드는 생각에 지아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너무 늦었다.

《색, 계》 中


죽음을 각오한 '사랑'.

불꽃 같으면서도 허무한 '사랑'은 장아이링의 작품에서 주요 테마다.



"삶은 화려한 비단옷과 같지만, 그 위에는 온통 이가 들끓고 있다."


〈천재의 꿈天才梦〉 中


장아이링은 이홍장의 외증손녀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문재로 이름이 났다.

스물네 살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열네 살 연상의 남자 후란청과 결혼했다.

결혼의 대상이 단순히 나이 많은 남자 정도라면 뒤에서 수군거리는 정도겠지만 이 남자는 난징 정부의 관료였다. 난징 정부의 관료는 친일 인사였고 그 때문에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사랑에 눈이 먼 대가는 비참했다. 장아이링에게 친일파의 꼬리표를 붙여준 후란청은 삼 개월 만에 불륜을 저질렀다.

그래도 장아이링은 바람을 피운 후란청을 잊지 못했다.

결혼 후 3년이 지나 또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야 그와의 인연을 끊을 수 있었다.

헤어졌어도 친일파의 여자라는 꼬리표는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상하이, 그리고 중국에 더는 머무르기 힘들었기에 홍콩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나는 통속 소설에 관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나 그들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때문이다.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색, 계》 中


장아이링은 남녀가 사랑할 때 전쟁이나 혁명보다 더 대담해진다고 믿었다.

확실히 그녀 자신의 인생은 그랬다.


그녀의 소설은 국가, 민족, 계급과 같은 거대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동시대 중국 작가들과 비교하면 이점은 더 두드러진다.

‘토지 개혁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소설은 쓰지 못하는 작가다.

당시 자신이 자라난 상하이, 홍콩과 같은 대도시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사랑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려내니 비현실적이었다.

당대 중국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민족의 운명보다 연애질이 더 중요하니 어불성설이기도 했다. 거기다 친일파 연인이다. 더 괘씸하다.

이런 작가가 공산당 이념에 부합하는 작품을 쓰지 않고 조국을 버려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했으니 중국에서 장아이링이란 이름이 금기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의 모래가 이념의 시대를 덮자, 상황은 바뀌었다.

현대라는 두 글자가 빛바랜 이름을 찬란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개혁 개방 이후 문학계의 재평가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해금이 된 통속 소설을 자라나는 세대가 읽으며 잊힌 이름을 되뇌었다.


국가, 민족, 계급보다 남녀의 애정이 중요한 시대,

미국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간 작가는 작품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새 시대의 소설이 되었다.


통속은 시대의 사랑을 받는다. 사랑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뜨겁고 쓸쓸하며 아련하고 저릿하며 허무하고 괴로운 사랑.

⟨색, 계 ⟩, ⟨정처없는 발길⟩, ⟨붉은 장미 흰 장미⟩, ⟨봉쇄⟩, ⟨증오의 굴레⟩의 다섯 작품은

사랑을 추구하며 사랑에 쓸려가는 인물들을 그린다.

뜨거운 사랑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이들은 부나방처럼 달려든다.

사랑을 믿는다면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녀 자신의 경험 때문일까.

사랑 후에 남은 허무함과 쓸쓸함이 빈 자리에 밀려든다.


현실은 낭만이 아니지만 사랑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의 감정 만큼은 진실되다.

'그 순간만 살아' 숨을 쉰다.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도 소중한 아름다움은 남아있다.


그러니,

잊혀진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된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기억으로.


전바오가 웃으며 말했다. "바쁜 사람을 좋아한다고요?"
자오루이가 한 손을 눈에 올리며 웃었다. "사실 상관없어요. 내 마음은 아파트거든요."
"그럼, 세를 줄 빈 방이 있나요?" 웃으며 또 물었는데 자오루이가 대답하지 않자 진바오가 말했다. "그런데 저는 아파트가 익숙하지 않아요. 단독 주택이 좋지."
자오루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능력 있으면 허물고 다시 짓든가요!"
(중략)
"그거 알아요? 나는 매일 여기 앉아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려요.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오다가 우리 층을 지나쳐 계속 올라가면 내 심장도 딸려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 기분이지요. 여기까지 오지 않고 멈추면 중간에 숨이 끊어질 것 같고요."
전바오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마음에는 엘리베이터도 있군요. 역시 당신 마음은 아파트였어."
자오루이가 담담하게 웃고는 뒷짐을 진 채 창가로 가서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집은 이미 다 지어졌어요."

⟨붉은 장미 흰 장미⟩, 같은 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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