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글씨가 유행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에서 손 글씨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설문조사에서는 손 글씨를 쓰는 이유로 '좋아하는 서적의 문구나 문장을 직접 써보기 위해서'와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많았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 키보드로 쓸 때보다 기억력과 학습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기억력을 향상하고 학습에도 도움이 되는 이점 때문에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손 글씨를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규정했다.
또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AI를 활용한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손 글씨 사용을 강제한다.
그러니 손 글씨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를 미리 내다보지는 않았지만 만년필을 사용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쓰다 보면 불편함에 혀를 차다가도 어느 순간 매력에 빠져든다. 불편함조차 오래된 만년필의 개량을 통해 좋아진 결과라니 기술의 발전은 빠른 듯하면서 느리다.
만년필을 처음 사면 잉크를 채워야 한다. 잉크를 주입하는 방식으로는 크게 컨버터(피스톤 식이나 나사 식)와 카트리지 방식이 있다. 어느 방식이든 잉크가 필요하다. 기껏 잉크를 채워 글씨를 쓰려고 해도 바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럴 때 젖은 휴지를 촉 끝에 가져다 대거나 드라이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쓰면 그제야 콧대 높던 만년필은 잉크를 종이에 떨어뜨린다. 다른 사람이 한번 써보겠다며 빌려간 만년필을 찾아 다시 쓰려고 하면 토라졌는지 묵묵부답이다. 만년필 뚜껑을 연 상태로 오랫동안 두어도 역시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실수로라도 떨어뜨리는 경우는 대재앙이다. 오래 사용하지 않다가 만년필을 꺼내 글을 써보려 하면 헛발질이 일쑤다. 잉크의 흐름이 끊기니 나던 흥도 사그라진다. 펜촉의 각도도 유의해야 한다.
물건을 쓰는지 상전을 모시는지 혼란스럽다. 잉크가 다 떨어지면 다시 채워야 사용할 수 있다. 만년필이란 상전을 모시는 이들 중 일부는 밥 주는 행위 또한 즐거워하니 중증이 따로 없다.
내가 모시는 분은 일본과 미국, 독일 어르신들이다.
길들지 않아 ‘여우’라는 이름이 붙은 일본 어르신은 카트리지만 선호하는 편식을 해 절로 사이가 멀어졌다.
미국 어르신은 파카 45다.
나이는 지긋하며 해외에 친구가 많다. 구식의 미국인인데 까탈스럽게 굴긴 하지만 막상 접해보면 이보다 부드러울 수가 없다. 이 어르신은 물려받은 구식 넥타이(컨버터)가 하나 있었지만 해지고 꽉 조이는 넥타이였다. 진지를 잡수실 때마다 수발하는 내가 아주 고역이었다. 새 넥타이 하나를 맞춰드리니 그것만 유독 새것이라 어색하긴 하지만 불편함이 없어졌으니 만족하고 있다.
만년필은 불편한 필기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볼펜이나 여타 다른 펜의 편리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전들을 모시는 이유가 있다.
첫째, 필기감이다. 다른 필기구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느껴지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잉크에 따라서는 필기감도 달라져 잉크를 바꿔 사용하는 맛이 있다.
둘째, 글씨가 교정되는 효과가 있다. 다른 필기구보다 조금 더 집중하게 되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글씨가 써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필기법과 글씨체가 바뀐다.
셋째, 구식이다. 만년필은 편리하지 않다. 그래서 매력이 있다.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점에서 남과 다른 특별함을 느낀다. 그 특별함이 남과 다른 멋을 부여하고 때로는 이를 즐기게도 된다.
만년필은 주인도 가린다. 그렇게 까탈을 부리던 필기구가 한번 길들면 주인의 버릇까지 살펴 필요할 때 잉크를 착착 내놓는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잡기라도 하면, 취향대로 길들이기에 시간이 걸린다.
이런 구식이고 불편한 필기구이기에 차분히 무언가를 쓸 일이 생기면 만년필을 잡게 된다.
글의 초안을 쓰는 와중에도 파카 45는 성질을 부린다. 슬슬 열이 올라 차라리 볼펜을 쓸까 하는 생각이 드니 그제야 고분고분해져 말을 잘 듣는다. 내가 만년필을 길들이는 걸까, 만년필이 나를 길들이는 걸까.
"아니야.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어린 왕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