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파울리스타의 원두를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
1911년 창업한 긴자의 카페 파울리스타는 현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
《커피 일가》 에서도 교토의 커피 역사를 논할 때 1912년에 생긴 카페 파울리스타의 교토지점을 거론할 정도로 유명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니자키 준이치로, 기쿠치 간, 나가이 가후 등 일본의 저명인사들 뿐 아니라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카페 파울리스타를 방문했다.
우리나라 문학사와도 그 연이 닿아있다.
김동인과 주요한이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의 창간을 논의할 때도 파울리스타의 커피가 함께했다.
성탄절 집회에 참여한 김동인은 '요한과 나는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고 〈문단 30년의 회고〉에서 말했다. 당시 유행하던 커피시럽이란 희석해서 마실 수 있는 농축 커피를 뜻한다.
그들은 김동인의 하숙방에서 파울리스타의 커피시럽을 마시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의기투합해 문학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이듬해 2월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다.
카페 파울리스타에 당대의 유명인들이 모인 이유는 긴자란 입지적 이점뿐 아니라 저렴한 커피값도 한몫했다.
당시의 커피값은 30전이었는데 파울리스타에서는 커피를 5전에 제공했다.
어떻게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
1888년, 노예 제도가 폐지된 브라질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유럽에서 노동자들이 건너가 일자리를 메웠지만 노예나 다름없는 주거 환경, 가혹한 노동, 형편없는 임금 등 열악한 대우가 알려져 노동자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치했던 이탈리아마저도 이민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커피 산업이 성장하던 상파울루는 노동자들이 절실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배상금을 받지 못했고 계속되는 인구 증가에 전후 경제 불안정까지 겹치며 실업 문제가 날로 심각해졌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농촌이었다.
궁핍한 생활을 하는 농촌의 노동자들을 어딘가로 보내고 싶었지만 인종차별이 날로 심해지는 미국으로 보내기엔 무리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브라질로 향했다.
일본의 식량난과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황국식민회사는 브라질로 향하는 예비 노예들에게 좋은 대우와 고임금을 약속했다.
이역만리로 향하는 그들이 금의환향할 꿈을 꾸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인들을 향한 취업 사기는 자국민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라질은 그들을 환영했다. 예비 노예들의 바뀌지 않은 주거환경과 노동, 임금도 그들을 환영했다.
현실은 가혹했다.
신분은 노예가 아니지만 생활은 노예였고 귀국할 돈이 모이기는커녕 부채가 늘어났다.
그들은 조국에 버림받았다며 자조했다. 취업 사기를 처음 깨달은 이들 중 3/4가 농장에서 야반도주했다.
황국식민회사의 사장 미즈노 류는 3년간 농업 이민자를 제공한 대가로 브라질 정부에서 12년간 원두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일본에서 커피 사업을 할 권리를 얻었다. 그 결과가 카페 파울리스타의 저렴한 원두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이들보다 취업 사기당한 이민자들이 많았고 뒤이어 브라질로 가는 이들 역시 기회가 없는 조국보다 기회가 있는 땅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있는 땅은 맞았다.
야반도주한 이들은 어떻게든 농지를 일구어 자작농이 되었고 일본인 이민자들이 모여 조합을 만들었다. 상황은 조금씩 나아져 성공한 자작농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 더 많은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브라질은 일본인 이민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식민지를 수탈한 일본도 풍족해진 곳간의 돈으로 이민비를 전액 지원했다. 일본 기업들의 브라질 투자도 활발해졌다.
브라질로 건너가는 일본인들이 줄을 이었다.
동화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일본인 이민자들은 서서히 브라질에 뿌리내렸다.
뿌리내린 일본인들의 문화는 브라질에 영향을 미쳤다.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강도관에서 시작된 강도관 유술, 즉 유도는 초창기에 굳히기(그라운드) 기술을 폭넓게 허용했다.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는 생소한 무술의 보급에 지루한 굳히기 공방이 방해된다고 판단해 메치기 중심으로 규칙을 개정한 것이 지금의 유도다.
이러한 흐름에 반대한 굳히기 중심의 유도를 칠제유도라 부른다. 칠제유도의 굳히기 기술은 초창기 유도의 굳히기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굳히기 기술을 배웠던 초창기 강도관의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는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세계를 떠돌다 일본인들이 많은 브라질에 정착한다.
그는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비롯한 브라질인들에게 자신이 배운 초창기의 강도관 유술을 가르쳤다.
마에다 미츠요는 유도란 생소한 이름보다는 습관처럼 입에 붙은 강도관 유술(주즈츠)이란 이름이 더 친숙했다. 이 일본의 무술을 그레이시 가문이 브라질의 환경에 맞게 발전시켰고 그것이 브라질리언 주짓수다.
일본이 거품경제 시기를 맞이하자 브라질과 일본의 관계도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본은 노동력이 부족했고 브라질에서 자라난 일본계 2, 3세들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일본 정부는 할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는 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했다.
일본은 일본문화를 잘 알고 일본어에 능숙한 노동력을 기대했고, 일본계 브라질인들도 할아버지의 나라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능숙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이 연합국에 가담하자 일본과 브라질의 관계는 바뀌었다.
브라질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소극적인 동화도 문제를 야기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브라질인들은 적국의 이민자들을 경계하고 차별하며 적대했고 이 경험을 교훈 삼아 일본계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브라질에 적극적으로 동화했다.
그들의 문화 및 언어와 멀어졌다.
2000년대 일본 축구 대표팀에서 활약해 한일전이 벌어질 때면 자주 보았던 일본계 3세 다나카 마르코스 툴리오.
툴리오 역시 일본어가 서툴러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과 뛰어난 축구실력으로 일본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누구나 툴리오가 되지 못한다.
언어가 미숙하니 교육이 안되고 교육이 안되니 저임금의 일용직을 전전한다.
문화가 다르니 이방인이 되고 이방인은 집단으로 따돌림 당하며 배재해 때려죽이기도 한다.
생활이 어려우니 범죄에 빠진다.
범죄에 빠져드니 일본인들과 갈등과 차별이 더해간다.
일본에 거주하는 브라질계 일본인들은 이제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계와 한국계 일본인 다음으로 많은 수다.
재일동포도 배척하는 일본은 과연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온 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카페 파울리스타의 커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