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바뀌었는데 왜 사랑을 못 하니

현진건 중단편선 《운수 좋은 날》

by 백수광부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생이란 옷을 입은 청년들은 교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를 따라 사용했다.


복잡한 개념을 간략한 단어로 표현 가능하고 교수에게 점수를 따려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더러는 그런 표현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하여 상아탑의 청년들은 사전에 여러 단어들을 추가했다.


그중 하나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란 정부는 시장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며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으로 경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경제학과도 아닌 다른 학과에서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자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외환 위기 이후 양극화를 초래한 이 사상의 폐해가 천민자본주의를 가속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신자유주의란 라벨은 자본주의 실패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고 학생들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면 학교 앞 편의점은 분주했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연인 또는 친분이 있는 이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고, 점원들은 그 대목을 맞아 대량의 주문을 하고 배치하기에 바빴다.


한 학생이 편의점에 들어서자 아르바이트생이 초콜릿 구매를 권한다. 평범한 호객 행위다.

피 끓는 청춘의 대학생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리 말한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은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고, 정신을 차린 아르바이트생은 얼른 이 미친놈을 매장에서 내보내야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어쩌면, 그 옆에서 빼빼로를 집어든 유학생은 고국으로 돌아간 후 친구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줬을지도 모른다.


내 앞 멀지 않은 곳에 이리로 향하여 젊은 남녀가 짝을 지어 올라온다. 그는 남학생과 여학생이었다! 그와 누님이었다!
나는 가슴이 설렁하며 일종의 호기심이 일어났다. 살짝 남의 집 담 모퉁이에 은신하였다. 둘은 내가 거기 숨어 있는 줄은 모르고 영어로 무어라고 소곤소곤거리며 지나간다.
그중에 이 말이 제일 똑똑히 들리었다.(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마 이 말인 것 같다.)

“Love is blind. (사랑은 맹목적이라지요).”
라니까 누님은 소리를 죽여 웃으며,
“But our love has eyes!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보는 사랑이지요.)” 하였다.

⟨희생화⟩ 中


신자유주의가 편의점의 대학생에게 영향을 끼쳤듯이 20세기 초, 하나의 사상이 한반도를 떠돌았다. 자유연애라는 사상이.

부모가 정해준 대로 장가나 시집을 가면 되지 바다 건너 온 문란한 사상이 남녀의 머리를 파고든 것이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함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끼리 결합해 가족과 가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개인이 사랑의 대상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결혼한다. 사랑을 하고 결혼한다.

이 연애결혼이란 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졌다. 사랑을 향한 욕망이 서구권에서 들어온 자유연애결혼이란 사상을 만나 숨통을 틔웠고, LOVE란 단어가 사랑으로 번역되고, 연애를 갈구하는 신여성들이 소설을 보고 그것을 상상했다.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 ⟨빈처⟩ 등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유전적, 환경적 영향을 강조하는 자연주의 작가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무정〉 으로 출발한 한국의 근대 문학은 현진건이란 정거장을 지나 지금까지 꽃을 피우게 된다.

식민지 조선을 예리하게 관찰해 탁월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근대 소설을 정교하게 빚었던 현진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오늘날 교과서에 실린 ⟨운수 좋은 날⟩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운수 좋은 날⟩을 읽고 토론한다. 그의 작품은 아직도 살아숨쉰다.



그의 작품에서는 데뷔작인 ⟨희생화⟩(1920) 부터 앞서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남녀의 연애를 자주 다룬다.

⟨희생화⟩ 에서는 비극으로 끝나는 자유연애를 묘사하고 ⟨B 사감과 러브레터⟩에서도 노처녀인 B 사감이 학생들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으며 사랑을 향한 욕망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자유연애 사상은 신여성 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파고 들었다.

오늘날에 비해 결혼을 일찍 하였고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남자들 역시 자유연애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조혼을 한 남자, 나아가 소설가들은 ⟨타락자⟩의 ‘나’처럼 결혼을 하고도 연애를 하였다. ⟨타락자⟩는 자유연애를 했던 자신의 고백이자, 동료 작가들에 대한 세태 고발이기도 하다.



⟨타락자⟩에서 부모의 뜻으로 결혼한 ‘나’는 춘심이라는 기생을 만나 연애한다. 술에 취한 '나'는 아내를 기생으로 착각하고 전에 없던 사랑의 감정을 내비추기도 했다.

'나'는 아내의 속도 모르고 기방을 드나드나, 연모하던 춘심은 돈에 팔려가고,

귀가한 그는 임신한 아내가 성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병독은 벌써 그의 순결한 몸을 범한 것이다. 오늘 청결하느라고 힘에 넘치는 극렬한 일을 한 까닭에 그 증세가 돌발한 것이다! 춘심의 사진을 처음 볼 때에 웃고만 있던 그로서 그것을 찢게 된 신산한 심리야 어떠하였으랴!
그의 태중에는 지금 새로운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 이 결과가 어찌 될까? 싸늘한 전율에 나는 전신을 떨었다. 찡그린 두 얼굴은 서로 뚫을 듯이 마주 보고 있었다. 육체를 점점이 씹어 들어가는 모든 독균의 거취를 살피려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독한 벌레에게 뜯어 먹히면서 몸부림을 치는, 어린 생명의 악착한 비명을 분명히 들은 듯 싶었다......

〈타락자〉 中


아내가 있음에도 자유연애를 추구한 '나', '타락자'의 사랑. 그 결말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여보게, 음악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주최가 여학교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의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올 것일세."

하고 매우 초조한 듯이,

"입장권은 내가 삼세, 음악이 싫거든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왜?"

"왜라니, 여학생의 구경이라도 가자는밖에."

학수는 뱉듯이,

"여학생은 보아 쓸 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상춘은 펄쩍 뛰며,

"쓸데란 말이 웬 말인가? 자네같이 쓸데 있는 것만 찾는다면 인생은 쓸쓸한 황야일 것일세. 캄캄한 그믐밤일 것일세.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것이 벌써 시가 아닌가? 행복이 아닌가?"

"시다? 행복이다? 흥, 내야 어디 자네같이 취미성이 있어야지."

빈정거리듯이 이런 말을 하건마는, 찡그린 그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상춘은 제 동무의 말은 들은 체 만체하고 꿈꾸는 듯한 눈자위를 더욱 반들반들하게 적시우며 시나 읊조리는 어조로,

"여자는, 더구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여학생은 인생이란 거친들의 꽃일세. 어두운 밤의 불일세, 햇발이 왜 따스한 줄 아나? 그들의 가슴을 덥히기 위함일세. 달빛이 왜 밝은 줄 아나? 그들의 얼굴을 바래기 위함일세. 꽃이 피기도 그들의 눈을 기쁘게 하려는 까닭이요, 새가 울기도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까닭일세. 그런데……."

(중략)

"참말이지, 요새 여학생은 눈잔등이가 시어서 못 보겠데. 기름을 바를 대로 바르고 왜 귀밑머리는 풀고 다니는지, 살찐 종아리 자랑이지는 모르지만 왜 정갱이까지 올라오는 잠방이를 입고 다니는지, 발등뼈가 튕겨 나와야 맛인가, 구두 뒷축은 왜 그리 높은지, 암만해도 까닭모를 일이야. 옆에만 지나가도 그 퀴퀴한 향수 냄새란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이름이 좋아서 하눌타리로 사랑은 자유라야 쓰느니, 연애는 신성한 것이하면서 얼굴만 반드레해도 그만 반하고, 피아노 한 채만 보아도 마음이 솔깃하고, 애꾸눈이라도 서양 갔다 온 사람이면 추파를 건넨다든가, 그런 천착하고, 경박하고, 허영에 뜬 년들에게 침을 게 흘리는 놈도 흘리는 놈이지. 그래, 그런 것들이 우글우글 끓는 음악회에 간단 말인가. 차라리 요귀가 끓는 지옥엘 가는게 낫지. 바로 제가 젠 체하고 단 위에 올라서서 몸짓, 고갯짓을 하면서 주리난장을 맞는 듯이 아가리를 딱딱 벌리는 꼴이란 장님으로 못 태어난 것이 한이 될 지경이다."

하고 학수도 까닭 모를 흥분에 목소리를 떨며 그 험상궂은 얼굴이 푸르락 붉으락하며 부르짖었다. 제 스스로 제 얼굴이 다시 더 못생길 수 없이 못생긴을 잘 아는 그는 여성을 대할 적마다 저 아닌 남으론 상상도 못할 만큼 심각한 고통을 느꼈다.

여성의 시선이 제 얼굴에 떨어지면 못생긴 제 얼굴이 열 곱, 스무 곱 더 못생겨지는 듯싶었다. 조소와 멸시를 상상하지 않고는 여성의 눈길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구러 그는 어느 결엔지 미소지니스트(여자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가 되고 말았다. 구식 여자보다 자유연애를――저는 일평생 가야 맛보지 못할 자유 연애를 한다는 신식여자가 더욱이 밉고, 싫고, 침이라도 배앝고 싶을 만큼 더럽고 추해 보였다.

〈까막잡기〉 중


〈까막잡기〉역시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그릇되게 표출하는 학수는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은 하면서도 본심은 그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투덜거리면서도 학수는 음악회에 갔다. 그곳에서 신여성이란 '괴물'이 학수를 연인으로 착각하고 뒤에서 학수의 눈을 가리는 '까막잡기'를 했다.

괴물의 정체를 알자, 학수는 여성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고 눈을 가린 여성을 찾아다녔다. 상춘 역시 음악회에서 여성에게만 관심이 있어, 눈이 마주치는 여성이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착각을 한다. 두 남자는 '사랑 맡은 귀신은 장님'이 되어 '이성의 눈이 감긴'다.


"왜 샘이 나나? 생각을 해보게. 보들보들한 손이 살짝 내 눈을 가리었단 말이지. 내 등에 그 따뜻한 가슴이 닿았단 말이지. '내가 누구예요?'하는 그 목소리! 그야말로 꾀꼬리 소리란 말이지......"
하고 학수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비꼬자마자 상춘을 부둥켜안았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나?"
하고, 상춘은 사정없이 뿌리쳤다.

같은 작품


여자를 욕하던 학수의 징그러운 변모. 사랑이 잘못했다. 그런 핑크빛 학수의 마음은 상춘이 보여준 거울 속 모습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거울 속에 비친 '이 더할 수 없이 못 생긴 괴물이야말로 갈데없는 저'이기 때문이다.



〈그리운 흘긴 눈〉은 당시 유행한 정사(연인끼리의 동반자살)를 다룬다.



기생 ‘채선’은 귀공자인 ‘그이’와 함께 한날한시에 알약을 먹고 죽기로 다짐한다. ‘채선’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그이'는 알약을 먹고 죽어간다. '그이'는 죽어가면서도 채선을 생각해 그녀의 입안에서 알약을 꺼내려 하자, 알약은 입 안 깊숙한 곳에 있지 않아 쉽게 잡히었다. 채선은 처음부터 죽을 마음이 없었다.

원망스레 채선을 흘겨보며 ‘그이’는 죽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채선은 배신을 당해 핏발 세워 흘겨보던 그 눈이 이제 그립다.

그리운 까닭은 흘겨보던 그눈에 담긴 증오가 '죽어가면서도 나를 생각한 만큼 거룩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진건은 인물의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 비추고 아이러니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드러낸다.

시대는 새로운 사랑을 부르고 근대는 소설로 대답했다.


"사랑이란 유동체니까 한 군데 매어 둘 필요는 없지 않아?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야말로 뿌르조아 사상이지. 난 이 동무하고……. 왜 저 학생 격문 사건으로 이태 징역을 치르고 나온 이풍우 동무가 있지 않아요? 난 그 동무와 애인이 돼 버렸어요. 그러고 한동안은 제삼자가 둘 새에 끼이지 않도록 약속을 해 버렸죠. 김 동무에겐 조금 미안한 노릇이지만……. 그래 된 걸 지금 어쩔 수도 없고……. 뭘 괜찮지? 내 나보담 더 좋은 애인 하나 골라 드릴게."

〈연애의 청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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