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사와자키의 시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by 백수광부



니시신주쿠에 위치한 상가 건물에 한 탐정이 나타난다.

그는 굴러간다는 이유만으로 타고 다니는 오래된 승용차인 블루버드를 주차장에 세우고 건물 2층에 위치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로 걸어 올라갔다. 탐정은 와타나베가 아니다. 사무실의 주인이었던 전직 경찰이자 탐정의 파트너였던 와타나베 켄고는 대량의 마약과 돈을 들고 잠적했다.

그래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는 의뢰인 대신 야쿠자와 경찰이 와타나베의 행방을 알기 위해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탐정의 성은 사와자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와타나베 탐정사무실 문 옆 벤치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손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가이후라는 이름의 의뢰인이다.

의뢰는 르포라이터인 사에키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 탐정물 사와자키 시리즈.

그 첫걸음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저씨가 진심으로 자기 일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는 믿지 않아요. 탐정이라는 일은 훨씬 남자다운 삶이랄까,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그런 것에 깊이 뿌리를 내린…… 뭐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이 믿는 것에 확신을 갖고……”
“어디서 그런 어설픈 소리를 배워왔니? 탐정은 그냥 직업이야.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런 직업이라는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거지.”

단편집 ⟪천사들의 탐정⟫ 中


사와자키의 말과 달리 하드보일드 소설의 탐정은 삶의 방식이 다르다. 냉소적이고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직업이라 말을 해도 행동은 다르다.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라는 챈들러의 글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하드보일드 탐정물의 탐정들이 그렇다.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에 큰 영향을 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도, 루 아처도, 샘 스페이드도 그러하다. 하물며 최근 아마존프라임에서 영상화도 된 잭 리처마저도 그렇다.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하라 료가 챈들러에 대한 경애를 드러내는 ⟨말로라는 사나이⟩란 원고를 ⟪레이먼드 챈들러 독본⟫에 수록할 정도니까.

⟨말로라는 사나이⟩는 국내에서 출판된 단행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도 실려있다.


"그게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였던가? 그 사람의 이런 대사는 들어본 적 있겠죠?"

"갑자기 들으니 자양강장제의 광고 카피처럼 들리는군. 그런 말은 뭔가 그럴듯한 질문이 있을 때 나와야 할 답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니 분명히 '당신처럼 엄격한 남자가 어떻게 그리 부드러워질 수 있느냐'는 여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던 것 같네요."

"요즘은 다들 답에만 신경을 쓰지, 질문 쪽은 생각하지 않아. 그만한 질문이 있어야 나올 대답인데 답만 끄집어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건 뭔가 잘못된 거지."

"그렇군요. 소설에서 한 문장만 뽑아낸다는 게 원래 난센스이긴 하군요. 그렇지만 다들 그 답에만 신경 쓰는 건 분명 요즘 남자들이 여자 입을 통해 그런 멋진 질문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말로라는 사나이⟩ 中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하라 료 자신만의 스타일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플롯은 챈들러 이상으로 치밀하다. 물론 챈들러가 플롯이 정밀한 작가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와자키는 눈앞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답하기도 하며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낡은 작품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비열한 거리를 헤치며 삶의 방식을 관철하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기에 여러번 읽어도 그 맛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의 사와자키" 같은 하라 료 특유의 유머가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

086.jpg 사와자키가 굴러간다는 이유만으로 타고 다니는 오래된 승용차, 닛산 블루버드
“조심해서 운전해줘. 탐정.” 하세가와가 말했다.”사실 당신 차는 아가씨를 모실 만한 물건이 아니니까.”

나는 오른손 엄지를 세워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조수석 문을 닫고 나오코에게 인사를 했다. 벤츠 옆에서 잔뜩 긴장한 블루버드의 시동을 걸었다. 내년이면 분명 자유계약으로 내몰릴 노장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분투해서 클린히트를 날리는 법도 있는 법이다. 기적적으로 단 한 번만에 시동이 걸렸다.
“딸을 바꿔주세요.”

사라시나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청구할 탐정요금에는 의뢰인의 아버지에게 명령을 받는 요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의뢰인의 아버지를 위로하는 요금도 물론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라 료는 과작의 작가다. 국내에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가 6편(장편 5편, 단편집 1권) 출간되었다. 매 작품마다 10만부 이상의 판매량을 올렸지만 작품 수가 워낙 적기에 작품을 쓰지 않을 때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궁금할 지경이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에 재즈 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라 료 트리오의 음반 ⟨I Can't Get Started⟩


형이 운영하는 사가현의 재즈카페 ⟨콜트레인 콜트레인⟩에 가끔 나타나 듀크 엘링턴이나 델로니어스 몽크의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사가현의 재즈카페 ⟨콜트레인 콜트레인⟩


하라 료가 2023년 5월 4일 타계해 고인이 되었기에 더 이상 그의 신작을 볼 수도, 실연을 들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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