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녕의《제》
미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이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살던 곳을 떠나온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희망을 품고 바다를 가로지르거나 국경을 넘었다. 그 소망을 우리는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부른다.
이민자들은 아메리칸드림이 진실이길 바라며 정착하려고 노력했다.
강한 의지로 종교도 국적도 바꾸지만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피부색만큼은 바꿀 수 없다. 피부색 때문에 큰 노력에도 돌아오는 시선은 무심하거나 차갑다.
김준녕의 소설 《제》에 등장하는 ‘한’의 가족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한국인 이민자다. 낯설고 거대한 땅은 ‘한’의 할아버지부터 ‘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79년, ‘한’의 가족들은 어떤 사건 때문에 미국 중북부에 있는 가상의 시골 마을 엔젤타운으로 오게 됐다. 엔젤타운은 돼지 농장이 있던 뉴저지나 저택이 있던 뉴욕, 천사들의 도시와 다른 곳이지만 느껴지는 시선은 익숙하다.
이들은 규칙과 배제라는 도구들을 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시선을 변화로부터 돌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를 갈라 놓고 싸움을 붙여야 했다.
쉬운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 방법은 수백만 달러의 돈을 쓸 필요도, 사람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연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 사이에 단 한 줄의 선을 긋기만 하면 됐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흑과 백, 남성과 여성 등. 사람들은 무리를 나누고, 시비를 걸고, 싸우고, 상대가 무너지면 고문했다. 이유야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키가 작아서, 살이 쪄서, 피부색이 검어서, 노래서, 여자라서, 남자라서, 눈이 찢어져서, 성기가 길어서, 짧아서. 일명 ‘평균’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정했다.
《제》 中
엔젤타운은 ‘평균’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WASP(앵글로 색슨계 백인 개신교도)가 그 평균이고 노란 피부를 가진 황인종은 순결한 마을에 묻은 불결한 징조다. 평균의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했기에 황인종들의 구분 따위 알고 싶지 않다.
더럽고 가난하고 불길하긴 매한가지니까.
평균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둥글지도 않고 국가도 여럿이 아니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국경을 지나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동방에 있다는 프레스터 조안의 존재를 믿어도 이상하지 않다.
마을과 미국만이 안전한 세계다. 그 밖은 타락했거나, 눈 찢어진 칭챙총들이 사는 미개한 땅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의 좁고 편협한 세계에서 국적도 인종도 종교도 하나만이 척도다. 평균인가, 아닌가. 심지어 교회마저 하나만 있다.
상대가 설령 호신용 스프레이를 민경에게 뿌린다고 해도 기세가 중요했다. 나는 너에게 겁먹지 않았다. 너는 나를 위협할 수 없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스토킹과 폭력이 만연한 이 짐승 같은 세계에서 민경이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제》 中
가난한 유학생 민경의 생존 방식처럼, 엔젤타운에서 ‘한’의 가족들은 자본과 권력, 신앙을 방패 삼아 ‘평균’의 이웃에게 무해함을 표하며 정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 쉽지 않다. ‘한’의 가족은 황인종이고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으로 마을에 군림하려는 그들은 일시적으로 불편함을 가려도, 이웃의 마음 속 혐오는 없앨 수 없다.
거기다 또 다른 한인 가족까지 마을에 합류했다. 정과 희, 그리고 아들인 준 가족이다.
가난하고 더러우며,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준’의 가족은 엔젤타운에서 혐오스러운 존재다. 한’의 가족은 방패가 있지만 엔젤타운에 불미스러운 일이 조금이라도 있어도 그 방패는 허물어져 혐오를 받는다. 불편한 동양인에게 혐오를 표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평균’이 되고 싶은 ‘한’의 가족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그럴수록 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준의 식구들을 증오한다. ‘한’의 아버지는 피부색과 고향을 바꿀 수도 없기에 ‘준’의 가족도 ‘평균’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준’의 식구도 이를 따른다.
어른들의 혐오는 아이들이 쉽게 배운다.
한국에서 왔다는 이방인 아이들에게 그 가르침대로 행동한다. 때리고 스트레스를 푼다. 아이들에게 폭력은 일상이다. 두 한국인 아이는 규칙을 정해 일상의 혐오와 폭력에 맞서기로 한다.
‘준’에게는 피부색만큼 바꾸기 어려운 비밀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질적인 타인을 극단적으로 배재하며 이교도들을 벌하는 원리주의적이며 이단에 가까운 기독 신앙을 가졌다. 이단에 가까운 기독 신앙을 가진 이들은 ‘준’의 비밀을 목격하고 공포에 떤다.
낯설고 이질적인 사탄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사탄은 동양인의 모습으로 먹고 말하며 일을 하고 심지어 학교까지 다닌다. 돈 많고 영어도 잘하며 같은 교회에 다니는 ‘한’의 식구들도 ‘준’과 같은 미개한 곳에서 왔다니, 그 옷을 벗겨보면 사탄임이 분명하다.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마을의 혐오와 공포가 준의 비밀을 만나니 초자연적 호러가 된다. 케이팝데몬헌터스 같은 긍정적인 현상이라면 모르겠지만 초자연적 호러가 배타적인 시골에서 긍정적일 리도 없다. 한국인이라면 알고 있을 신들림은 그들에게는 더 큰 공포다.
‘한’도 ‘준’의 비밀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고 자신에게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남을 안다.
소설은 가난한 유학생 민경과 이민자 ‘한’, 그리고 한과 같은 마을에 살던 ‘준’의 식구들의 이야기를 빠르게 오가며 보여준다.
집안의 배경도 시대도 다르지만 낯선 지방에서 마주치는 차별과 혐오가 기회의 땅에서 무속의 신내림을 만나 호러라는 꽃을 핀다.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은 타인을 이해할 생각 없이 증오하고, 공포와 혐오로 스스로 타락한다. 피부색과 국적, 문화가 다르다고 증오하고, 왜곡하며, 공포를 퍼뜨리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공포와 혐오로 좁아진 눈은 타인을 괴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자신마저 괴물로 만든다.
혐오와 증오로 이끄는 공포는 오늘날, 더 이상 미국의 일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