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먹는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슬 Aug 04. 2019

라면스프를 넣은 라볶이

갈라진 떡에 배인 양념이란

  5교시를 마치고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해질 무렵 집에 들어왔다. 집 안은 지는 해로 빨갛고 적막했다. 물을 마시려고 주방에 가니 식탁에 놓인 메모를 발견했다. 아침에 일하러 나가시기 전에 써놓고 가셨을 것이다. 주변에 뒹구는 아무 펜이나 잡고 빠르게 적어내린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 시골 갔다 올게. 냄비에 국이랑 밥솥에 밥 있어.'


  가끔 있는 일이었기에 시골에 다녀오시는 것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밥도 그냥 밥솥에서 퍼서 대충 김이랑 반찬이랑 먹으면 될 일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에 신이 나서 바로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도 집에 들어왔는데 나를 보는 동생의 시선이 느껴졌다. 3남매인 우리 집은 부모님의 통제가 어려운 것을 핑계 삼아 컴퓨터 이용 시간이 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로 하루에 사용 시간을 정해두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때 컴퓨터를 하는 시간은 누가 하던지 사라진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했어?
방금 시작했어, 한 10분?


  미심쩍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남동생은 안방에 TV를 보러 들어갔다. 왜 컴퓨터만 켜면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를 일이다. 2시간 정도 지나니 남동생이 자기도 하겠다고 방에 들어온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동생을 옆에서 구경만 시키게 한 결과 뿔이 난 것이 보였다. 분명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꽤 했던 느낌인데 물증이 없으니 입만 나오는 것이다.

  다행히 큰소리가 나기 직전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동생이 하는 게임은 흥미가 없어서 이제는 반대로 내가 TV 채널을 돌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귀찮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배고픔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제 언니가 곧 온다는 무언의 기대감이 있었다.



  똑똑똑, 두꺼운 현관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푸른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언니가 집에 왔다. 고요한 집안에 말없이 집중하고 있는 두 동생들을 잠깐 쳐다보더니 물어본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아직."



라볶이 해줄까?


  컴퓨터 때문에 살짝 긴장감이 맴돌던 나와 동생의 마음이 일치하던 순간이었다. 응 하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항상 부모님이 집을 비우실 때는 라볶이가 함께했다. 아직 요리는 물론이요 가스레인지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나와 동생은 라볶이를 언니가 해줄 때밖에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떡볶이는 밖에서 사 먹을 수 있지만 라볶이는 그와 다른 묘한 감칠맛이 있었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손만 씻은 채 언니가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냉동실에서 얼려놓은 가래떡을 두어줄 물에 담가 놓고 야채를 대충 손질하기 시작한다. 양파와 파, 어묵을 듬성듬성 썰어 놓는다. 프라이팬에 물을 붓고 팔팔 끓고 나면 떡을 먼저 넣는다. 나는 옆에서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가 할 일은 눌어붙지 않게 젓가락으로 팬을 젓는 것이었다. 언니는 옆에서 고추장과 고춧가루, 설탕을 대강 넣어 색을 낸다. 그리고 썰어 놓은 야채를 넣고 라면사리까지 넣는다. 마지막으로 라면스프를 넣으면 끝이었다. 스프를 조금씩 넣어보면서 간을 맞추고 양념이 걸쭉해지고 면이 익을 때까지 끓여내었다.


  고요한 집안이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차니 동생도 방에서 슬며시 나왔다. 식탁에 각자 그릇을 앞에 두고 수저를 놓는다. 프라이팬채로 올려진 라볶이에 통깨를 조금 뿌리고 함께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식사를 시작한다. 얼려 놓았다가 바로 열을 가한 떡은 군데군데 갈라져 모양은 좋지 않지만 양념이 잘 배어들었다. 꼬들꼬들한 라면 사리에 어묵을 얹어 먹는 맛은 특식 아닌 특식이었다. 동생들은 엄마 아빠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게임에서 이뤄낸 성과를 언니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언니도 게임을 좋아했기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대화를 나눴다. 가끔 양이 모자라면 라면사리 하나를 더 넣어 볶아 먹을 때도 있었는데, 항상 국물까지 다 긁어먹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설거지 당첨이었다. 군말 없이 설거지를 하고 동생들은 다시 화려한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한숨 돌린 언니는 주방을 잠시 둘러보았다. 동생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밥과 국을 확인하고 쉬는 것을 막기 위해 냉장고에 조심히 담아 넣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똠양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