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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장 Jun 17. 2023

제주에 살아도 제주가 그립다

[독서산문] 최악을 극복하는 힘 _엘리자베스 스탠리(이시은)

# 가자, 제주로!

입도 2년 차. 그렇다. 나는 육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꿈에도 그리던 제주에, 바로 그곳에 살고 있다. 나는 취직이 늦었다. 결혼도 아이도 늦었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이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직을 했다. 그것도 원하는 직장으로 말이다. 비록 수입은 조금 줄었지만, 충분히 만족한다. 나는 이직과 동시에 ‘제주 지사’ 근무를 희망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제주 살이’는 시작됐다. 2019년, 그 해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잘 풀렸다. 주변 사람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우리는 제주로 향했다. 떠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가자, 제주로!


‘제주 살이’는 상상만으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주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이들이 뛰어놀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어째 시작이 좋지 않다. 2020년 1월. 코로나는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마스크 없이는 숨 쉬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이렇다 할 지인도 없는 ‘육지 사람’인 우리 가족은 그렇게 고립되어 갔다. 세상과 단절된 채 툭 떨어져 나온 기분이었다. 섬 안에 또 다른 섬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견뎌낼 만했다. 관광객이 줄어든 제주는 오히려 한적했고, 여유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 대신 자연을 많이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역시 새로 옮긴 어린이집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퇴근 후 이따금씩 즐기는 여유는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바닷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은 꿈꾸던 삶 그 자체였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머.


집 앞 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코로나는 감춰둔 발톱을 꺼내며 세상 곳곳을 할퀴는 것만 같았다. 과연 코로나가 끝나기는 할까?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어느새 마스크는 얼굴의 일부가 된 것처럼 외출의 필수품이 되었다. 올여름휴가는 특히 힘들었다. 그동안 국민들도 많이 힘들었는지,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제주도는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다. 관광객은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감염자도 급증했다. 게다가 장마까지. 집 밖은 위험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 가정 보육이 시작된 것이다.


# 숨 좀 쉬자

그동안 우리 부부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린이집’ 덕분이었다. 아이들과 잠시 떨어져 있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너무 소중했다. 어린이집 덕분에 집안일도 하고, 개인적인 여가도 즐길 수 있었다. 육아와 가사, 그리고 직장. 바삐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어린이집 덕분에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스크를 잠시 벗은 듯 해방감을 누렸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덕분에 지친 일상에서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휴원이라니, 그것도 2주씩이나!! 아내는 절망했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히려, 아이들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낼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안정 애착을 형성해 보겠노라고 결의를 다지기까지 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나는 하필이면 가정 보육이 시작될 즈음부터 일이 바빠졌다. 연일 야근이었다. 종일 시달린 아내를 위로하고, 육아의 바통을 이어받지는 못할망정 야근이라니! 집 밖으로 쉽사리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내는 홀로 아이 둘을 온종일 감당했다. 아내는 숨이 막혔던 것 같다. 인내심은 바닥났고, 결국 폭발했다.


사람은 저마다의 ‘인내의 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의 창’을 넘어서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누구든 폭발한다. 억눌러도 소용없다. 몸은 스트레스에 솔직하다. 스트레스는 머리가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 아내의 ‘인내의 창’은 온종일 좁아지기만 했을 것이다. 가정 보육 기간 동안 아내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했다. 종이접기, 그림 그리기, 점토 놀이, 책 읽기... 욕심이 지나쳤을까? 그때마다 아이들은 아내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집중력은 쉽게 흐트러졌고, 스케치북이 아닌 곳에 색칠을 했다. 자꾸만 점토를 흘렸고, 책을 찢기도 했다. 일하느라 늦는 남편이 미웠을 것이고, 쌓여가는 집안일이 짜증 났을 것이다. 그리고 자꾸만 소리치는 자신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아내의 스트레스는 적금처럼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때로는 원금보다 듬뿍 이자를 얹혀주면서 말이다.


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물론, 나도 피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나에게 아내는 작은 부탁을 했다. 나는 평소와 달리 거절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내는 폭발했다.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기폭제가 되었고, 짜증 섞인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고야 말았다. 등을 돌린 채 잠든 그날 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행복은 건조하게 말라버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답답했다. 마스크를 벗었어도 숨이 막혔다. 제주에 살고 있지만, 제주가 그리웠다.


# 가자, 나만의 제주로!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나는 어디로든 도망치고만 싶었다. 때마침 연일 퍼붓던 장맛비가 잠시 그쳤다. 우리는 내내 집에만 있어야 했던 아이들을 핑계 삼아 외출을 했다. 삭막하게 말라버린 그곳, 집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었다. 붉은오름 휴양림. 왠지 그곳에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만 같았다. 예상대로 한적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걸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희석시키고 있었다. 부슬비가 내렸던 그날의 숲길은 유난히 고요했다. 아이들은 숲속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뛰지 마라, 조용히 해라.” 다그치려다가 그만 멋쩍게 웃고 말았다. 모처럼 밝은 표정의 부모가 반가웠는지, 아이들은 연신 까르륵 웃으며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재롱에 우리는 언제 다투었냐는 듯이 함께 웃으며, 산책을 즐겼다. 이따금씩 비가 흩뿌리기도 했지만, 빽빽한 나무가 우리의 우산이 되어주었기에 괜찮았다. 비에 젖은 숲은 오히려 포근했다. 그리고 그날의 숲은 다정했다. ‘그간 쌓아둔 스트레스는 여기에 두고 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에 흠뻑 젖어버렸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이 들었다.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도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그날 저녁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덕분에 꽉 막혔던 가슴도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의 산책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맑은 날씨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았으면, 그래서 온전히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제주 살이’ 그 자체만을 바랐었다. 그리고 그저 아이들이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만을,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었다. 그러던 나는 어느새 끝없는 욕심으로 현실과 기대를 저울질하며, 좌절하고, 우쭐했었다. 때로는 나 자신을 다그치며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 이렇게 밝게 웃는 아이들이 있는데, 아름답게 물드는 노을이 있는데,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같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나는 제주에 살면서도 제주를 떠나 있었나 보다. 오늘을 살아야겠다. 지금, 여기를 살아야겠다. 다시, 가자. 나만의 제주로!



※ 위 글은 책의 내용을 옮겨 적고,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아울러, '2021년 제주 마음건강 수기 공모전' 입선작임을 밝혀둡니다.


2021.10.3.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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