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약의 맛

by 킹스톤

10년이 되는 날에 재계약을 하자.

그 정도의 시간이면, 이 결혼을 유지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날이 이제 코앞이다.

설마, 그만하자고 말하진 않겠지.


결혼 10주년 선물로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꽤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자꾸 낯선 타국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언젠가 말했었다. 10주년이 되면 기념여행을 저 멀리 해외로 가자고.

그랬던 우리가 제주도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올해 우리 가족에게 벌어진 일들이 워낙 많아, 그럴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렇다면 뭘 해주면 좋을까.

너무 진지하지 않으면서 웃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금값이 치솟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때, 대뜸 순금으로 된 아주 두꺼운 용반지가 떠올랐다. 나도 그런 반지는 껴본 적이 없었다. 반지를 보고 황당해하며 웃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서 상상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났다. 오케이 좋았어.


나는 곧바로 반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분주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결정을 해야 조금이라도 싸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반지는 좀... 심했나...'


계속 보다 보니 용반지를 사는 순간 재계약은 힘들 것 같았다. 아내가 ‘물이 많은 사주’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는지, 물고기 디자인에 눈길이 갔다.


갈팡질팡하며 며칠 동안 핸드폰만 들여다보다 드디어 ‘이거다’ 싶은 디자인을 찾았다. 그런데, 이런 맙소사. 아내의 손가락 사이즈를 모르고 있다니. 하긴 내 손가락 사이즈도 모르는 나였다. 아내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볼 방법을 고민했다.


“우리 결혼반지 사이즈가 어떻게 되지?”

“왜 반지 사주게?”


이번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를 채 버린 아내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자.


“사실 요즘 금값도 비싸고 해서 내가 금반지 하나 해주고 싶어서.”

“무슨 반지야, 괜찮아.”

“두꺼운 금반지 하나 해줄게. 그것도 순금으로! 어때? 나중에 많이 오르면 팔아서 여행을 가도 되고...”


말끝이 흐려졌다.

선물하기도 전에 팔 생각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재테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물며 여행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퇴직을 앞두고 ‘나중에 더 못해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튀어나온 것일까.


그것은 더 이상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를 놀러 갔을 때,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아내와 나누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는 못 올 것처럼 굴지 말자."


그래, 맞아. 조급해할 필요 없지.

조급해하는 순간 모든 선택은 산으로 간다.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큰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그 순간들을 아내와 내가 함께 했다는 사실 아닐까?


허세였던 것 같다.

금반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10주년 결혼기념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래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고민하는 사이,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닭볶음탕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가볼래?”

“... 어? 닭볶음탕?? 하하하 와... 맛있겠는데?”


고민하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서둘러 집을 나섰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몰래 준비해 둔 손 편지를 건넸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한참을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어.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우리들의 수많은 추억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바람처럼.

보통 지나온 세월을 이야기할 때, 참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말하곤 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게 될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라더니 그 말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참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을 할 때 시간이 빨리 가잖아. 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우리의 10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은 참 재미있었다는 증거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지난 10년 동안 참 재미있었다.
항상 부족한 나와 함께 잘 놀아줘서 너무도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야.
언제나 그렇지만 유독 우리의 기념일이 다가오니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드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믿어주는 너를 만났기에 내가 지금까지 잘 버틸 수 있었어.
10년을 살아보고 재계약을 할지 말지 결정하자고 농담반 진담반처럼 말하고는 했는데,
절묘하게도 올해 많은 변화들이 찾아왔네.

때로는 지금의 변화들이 두렵고 무섭다는 생각이 불청객처럼 찾아오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 있으니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알겠지만 여태껏 잘 살아온 나를 그리고 우리를 믿기로 했거든.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들. 고마워.
앞으로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어떤 시련이 와도 견딜 수 있도록 다시 잘 가보자.
그리고 여전히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025년 10월 17일 재계약 완료.


아내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그랬다.

아들은 멋쩍은지,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고 처음 써본 손편지였다.

다행히도 재계약은 무난히 성사되었다.


물론, 계약금으로 몇 십만 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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