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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의 불치병

by 킹스톤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아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눈치챈 나는 또 무슨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막간을 이용해서 학교 숙제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다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아빠. 인터뷰 좀 해도 될까?”

“어? 인터뷰? 갑자기? 아빠를 인터뷰한다고?”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에서 가져온 한 장의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동네 슈퍼맨’ 인터뷰하기.


종이에 쓰여 있는 제목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리 동네 슈퍼맨이 아빠야??”

“응. 부모님 해도 된다고 했어. 그리고 내가 아빠 쓰레기 줍는 것도 보고,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봤으니까. 우리 동네 슈퍼맨이지.”


물론 경찰관이나 소방관 같이 인터뷰 조사 대상에 대한 예시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저녁이 다 되어서 인터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무슨 인터뷰인지 종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1. 인터뷰 대상자

2. 인터뷰 대상자에게 인사드리기

3. 어떤 일을 하시나요.

.

.

.


여러 항목들이 있었지만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나도 나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인데도 도무지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7일이 넘는 추석 연휴가 끝난 지 대략 15일의 시간이 흘렀다. 나도 아들도 일상으로 돌아온 뒤의 적응이 쉽지 않았다. 사실 내가 더 그랬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머지 시간들을 대부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붙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강제력이 되어주는 루틴이 또다시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것은 아마도 일주일이 넘는 연휴를 알차게 소비하고 온 후유증 같았다. 소비는 공허함을 부르기 마련이다. 마음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피로감이 가시지 않았고,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나의 수면의 질을 탓하기엔 정도가 좀 심해 보였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도통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을 때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지나온 연휴 동안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아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꿈 말이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파트라는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아늑함과 답답함은 종이 한 장의 차이 같았다. 몸에 착 감기기라도 하듯 오랜만에 돌아와서 누운 소파의 익숙함이 너무나 좋았다.

안부

만나는 친척마다 나에게 제주도의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말한 적이 없는데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당연히 부모님에게 전해 들었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이 아님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처음 몇 번은 내가 마치 변명을 늘어 놓 듯했다. 그런 내가 싫어서 나중에는 그 마저도 말을 아꼈다. “뭐. 잘 지내고 있어요.”정도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주눅 들 필요는 없었다.


퇴직

연초부터 계획했던 그날이 다가왔다. 계속 고민했지만 퇴사를 하겠다는 마음은 굳어졌고, 인사과에 퇴직의사를 밝히기 전에 팀장을 먼저 만나서 말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장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약속장소로 이동하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회사에 대한 감정은 애정과 애증 사이에 있었던 모양이다. 팀장은 나를 만나자마자 보직변경은 좀 힘들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훨씬 센 퇴직카드를 꺼냈다. 팀장은 당황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냐며 되묻는 것 같았지만 굳이 답하지는 않았다. 그와 나는 다르니까 말이다. 퇴직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나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아직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잠깐의 정적을 깨고 내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일단 이 지긋지긋한 교대생활을 내 손으로 끝냈으니 축배를 들어야죠.”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며 팀장도 같이 웃었다. 팀장은 그 순간만큼은 내가 부러운 것 같았다. 아내는 시부모님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상의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영영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퇴직 처리가 다 되면 그때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명절에 고향을 온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재잘대며 술잔을 기울이는 그런 일상이 새삼 즐겁게 다가왔다. 예전에는 추억팔이나 하는 그런 술자리들이 그렇게 싫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고향에 친구가 왔다고 반겨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 프로포즈

같이 영화를 만들던 친한 친구가 12월에 결혼을 한다. 그 친구는 몇 달 전부터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싶어 했고, 내가 꼭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추석 연휴 때 진행하자고 말했었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급하게 단편영화 한 편을 찍게 되었다고 말하고 여자친구를 그곳으로 불러내어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카메라를 잡았다. 역시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 성공적인 프러포즈가 되었다. 친구가 진심을 담아 써온 편지를 읽는 순간을 찍다가 주책맞게도 내가 울고 말았다. 물론 여자친구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뒤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내 생각이 났다. 곧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10주년.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다. 10년 정도 살아보고 결혼 계약을 다시 할지 말지 정하자며 농담을 치곤 했었는데 그날이 코 앞에 오고야 만 것이다.

더 이상 침대에 붙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강제력이 발동했다. 일단 나가자. 나는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10주년을 더벅머리로 지저분하게 맞이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재계약을 성사시켜야만 했다.

나는 미용실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는 한 5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머리카락을 다듬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아이 엄마는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계속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아이 엄마는 세상 다정함을 유지하며 아들을 타이르고 있었다. 내 머리를 만져주시던 미용사가 그 모습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참. 너무 이쁜 모습인 것 같아요."

“그렇죠 너무 이쁘죠.”

“고객님은 저런 시절이 그립겠어요.”

“그립죠. 근데 가장 힘든 순간이기도 해요. 말을 참 안들을 때라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왜 나는 우리 아들에게 끝까지 살갑게 대하지 못했을까. 저렇게 예쁜 아이를, 저 예쁜 시절을 이렇게 그리워할 거면서. 후회할 거면서 말이다. 그때 내가 감정적으로 잘 대해줬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좀 달라졌을까?

아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금방이라도 툭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눈을 감고 말았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미용사가 나에게 말했다.


“고객님 더우세요?”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눈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말라고 이마에 붙여주신 투명필름이 나의 열기 때문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다행히 눈물은 참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또 주책맞게 사연 있는 사람처럼 울뻔했다.


후회의 순간들은 이처럼 불현듯 다가온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포기한 것들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계획 없이 떠나온 이곳에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혼자서 우뚝 설 수 있겠지?

내가 왜 침대에 붙어서 일어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또다시 엄습한 불안함. 그 무게에 어김없이 또 짓눌려 버렸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불안함을 안고 산다.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그 감정들은 무척이나 힘들게 다가온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아들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복잡해진 머릿속과는 다르게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저는 회사를 다니면서, 가끔 영화를 만들고 글을 씁니다.”


퇴직의사는 밝혔으나 아직 사직서를 송부하지는 않았으니 회사를 다닌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터뷰는 간결하게 끝이 났고, 내가 내뱉은 말에 질세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쓸 때마다 두려움에 빠진다. 많이 쓰다 보면 계속 술술 써질 것 같지만 매번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막막함에 불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겠다는 마음을 먹고 써 내려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머릿속으로 구상한 대로 쓸 때도 있고, 어떤 날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어떤 날은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고, 써 내려가야만 삶을 버틸 수 있는 불치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원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며 작가도 아닌, 슈퍼맨은 더더욱 아닌 항상 애매한 위치에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어쩌면 내가 제주로 온 건 그 불치병으로부터 나를 살리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을 열어준 건 아들이었으니, 아들 덕에 내가 제주도에 왔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다.


나는 아들 덕에 제주도에 왔다.


그 많던 제비들은 이제 남쪽으로 떠났는지 보이지 않고, 텃새인 직박구리가 남아 여기저기서 짝을 찾아 울어 댄다. 나무 밑에는 언제부턴가 낙엽이 보이기 시작했고, 멀리 보이는 귤나무에는 주렁주렁 달린 청귤이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버렸다.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다시 따뜻한 봄날이 올 때까지 잘 버텨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다행히 괜찮아지기는 하는 것 같다. 무려 15일이나 걸렸지만 말이다.

사실상 나의 선생님인 사랑하는 아들과 누구보다 나를 믿어주는 아내가 있으니 앞으로 더 용기를 내볼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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