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Remember?
외로움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던 그 시절, 내게는 하루하루가 한겨울 가장 깊은 밤만 같았다.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갇힌 기분, 쓸쓸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뜨거운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겨우 숨이라도 쉬려면, 살아있는 생명체의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그 시절 나는 우리 ‘깜비’를 만났다. 여기서 깜비는 사랑스러운 반려견의 이름이다. 깜비는 전체적으로 윤기 흐르는 근사한 검은 털과 앞가슴과 다리 아랫부분, 볼과 눈 부분은 갈색 털을 가진 작은 체구의 미니핀 견종이다. 사랑스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꽤 까칠한 성격의 여자아이다.(반려동물은 주인 성격을 닮는다고 하더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깜비와 나는 어차피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나는 매일 술에 취해 걷다 집 근처 펫샵 진열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리고 한참을 서서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을 구경하는 게 하나의 진통제였다. 어느 날(나와 닮은) 잉글리시 불도그 한 녀석이 눈에 띄었는데, 녀석에게 ‘뚱스’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나는 매일 저녁 뚱스를 보러 애견샵에 갔다. 한 번은 가게주인이 들어와서 보라고 하길래, 별생각 없이 뚱스를 안아 보기도 먹이를 줘보기도 했던 게 하루 일과의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녀석을 매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고민하다 뚱스를 가족으로 맞을 결심을 하고 가게에 갔지만, 뚱스는 이미 외로운 누군가의 단짝이 되고 난 뒤였다. 상심한 나에게 주인은 다른 녀석들은 보여줬지만, 눈에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반려견이 좋은 게 아니라 뚱스가 좋았단 말이다. 그 통통하고 우락부락한 외모에 느릿느릿한 동작이 딱 나를 보는 거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유독 큰 검은색 치와와 녀석이 나에게 와서 안기더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우리 인간은 참 이상하다. 살아있는 대상은 어떤 종이든 이름을 붙이려는 무의식이 있나 보다. 나는 녀석에게도 ‘깜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 밤새 녀석 생각을 하다 결심한다. 다음날 다시 가게에 갔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 인지, 깜스도 그 짧은 하루를 참지 못하고 다른 주인을 만나 떠난 것이다.
나와 강아지는 인연이 아니다 싶어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제일 구석에서 슬프게 창밖을 보고 있는 깜비를 봤다. 그날 창밖을 슬프게 바라보던 깜비의 눈빛은 마치 내 어두운 마음을 비치는 거울 같았다. 그 순간, 그 아이가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녀석의 눈이 너무 슬퍼 보여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슬픈 눈을 가진 녀석이 내 인생에 들어온 것이다. 깜비라는 이름은 까매서 ‘깜’과 슬플 ‘비(悲)’라는 의미다. 나의 서러운 외로움과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미와 이별한 깜비의 슬픔이 이 관계의 연료가 되었다. 아마도 나는 뚱스도, 깜스도 아닌 깜비를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영화 속 도그와 로봇의 이별을 보면서 문득 깜비와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그가 로봇을 그리워하며 고개를 떨구는 장면에서, 나도 언젠가 깜비를 떠나보내야 할 미래가 겹쳐 보였다. 차마 상상하기 힘든 순간이지만, 그 이별이 얼마나 깊은 상처로 남을지 이 영화가 알려 주었다. 다행히 나는 그들처럼 깜비와 헤어진 적은 없지만, 그들의 이별에 대한 상실과 관계의 깊이는 느껴진다. 그리고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하고, 마음이 찡해졌다. 사실 영화는 사람과 반려동물과의 관계보다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관계의 속성에 대해 다룬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헤어짐이 주는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의 아련한 감정 말이다. 영화는 그 감정이 과거로 회귀되는 것보다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성숙한 관계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교감을 하고, 마음을 나누는 데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풀어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우선 영화는 음악은 나오지만, 일종의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없다. 요즘 세상에 대사가 없는 영화라니, 이상하다 싶겠지만, 오히려 대사 없이 점과 선으로 그려지는 영화 속 캐릭터들은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전한다. 말이 없어도 그들이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는 마치 말 한마디 없이도 나와 교감하는 깜비와의 관계와 닮아 있다. 마주 보는 눈빛 하나, 천천히 다가와 내 손에 닿는 그 작은 체온만으로도 수백 가지 감정이 전달되듯, 영화 속 캐릭터들도 말없이도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반려인들은 공감하겠지만, 인간과 다른 종들도 감정을 교감할 능력이 있다. 어느 날, 지친 마음에 눈물을 참기 힘들던 저녁이었다. 그때 깜비가 조심스레 내 옆에 다가와 앉더니, 작은 앞발로 내 허벅지를 가만히 톡톡 건드렸다. 아무 말없던 깜비의 손길에서 오히려 큰 위로를 느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잔잔한 파동처럼 울려 퍼졌다. 반대로 내가 기분이 좋은 날엔 자기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짧은 꼬리를 쉬지도 않고 흔들고 (정말) 웃는다. 이렇게 말없이도 마음에 공감할 수 있고, 순간순간 울컥 눈물도 올라오는 것이 관계의 미학 아닐까.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언젠가는 도그와 로봇처럼 이별에 대처해야 한다. 언젠가 깜비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야 할 날이 오면, 나를 처음 만났던 그날,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순간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낸 날들이 깜비에게도 행복한 시간이었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했다’라는 마음을 눈빛으로 전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만날 또 다른 깜비와의 행복을 빌어 주었으면 한다.
Do You Rem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