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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뱅커 Apr 26. 2024

영화 <성냥공장 소녀>

그녀는 창녀가 되려고 한 것인가


“창녀(같은)!” 몇 안 되는 대사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단어가 주는 의미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기에 이런 잔인한 말을 듣는 것일까? 영화는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소녀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그린다. 영화 시작부터 보이는 공장은 그녀의 세계이자 새가 ‘깨고 나올 알’과도 같다.

성냥공장 속 소녀

우울하고 단조로운 노동이 일상인 그녀는 구원을 꿈꾼다. 밤이면 서툰 화장을 하고 댄스 클럽으로 향하지만 그녀를 구원해 줄 누군가는 없다. 어느 퇴근 날 내면의 욕망과도 같은 빨간색 드레스를 사고 집으로 온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아버지는 “창녀(같은)!”라는 말로 그녀를 경멸한다. 마치 드레스가 성냥머리의 빨간 화약처럼 모두를 불태우는 시발점이라도 될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태워 빛나다 금세 사라질 드레스를 입고 클럽으로 향한다. 드레스는 한 남자의 욕망과 만나 금방 꺼질 불꽃을 일으킨다. 아마도 첫 경험이 아닐 것만 같은 그녀와의 짧은 욕망이 끝나고 남자는 돈을 두고 떠난다. 아버지의 말처럼 그녀는 창녀가 된 것만 같다. 그 하룻밤으로 아기가 찾아온다. 아기를 통해 무미건조한 삶의 구원, 희망을 꿈꾸지만, 그와 가족들은 그녀를 버리고 만다. 세상은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더욱 냉혹하고 비정하다.


그녀는 잠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위태로움을 보인다. 그녀가 약국에서 쥐약을 살 때 제발 그 선택만은 아니길 바랐다.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세상을 향해 차가운 복수를 한다. 마치 <친절한 금자 씨>의 금자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그를, 자신과 닮은 맥주 집의 남자를, 부모에게 최후를 선사한다.


욕망의 드레스
부모를 죽이는 소녀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까? 클럽을 향하는 그녀의 목적은 순수했을까? 그녀 또한 쉬운 사랑, 쉬운 구원을 바라며 타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모의 이해 못 할 냉정한 행동에는 우리가 모르는 서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세상의 피해자이기도 가해자 이기도 하다. 상처받았다고 그녀의 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어쩌면 상처보다 분노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특히 자신과 닮은 맥주 집 남자의 술잔에 쥐약을 넣으며 짓는 옅은 미소는 소름마저 돋는다.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지막 성냥개비를 태워 담배를 문 그녀는 당당해 보인다. 자신감까지 있어 보인다. 마치 세상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태워 버리는 응징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잔혹 동화 속 마녀처럼 말이다.


“사랑의 꽃은 이젠 필수가 없어.
너의 차가운 눈길과 냉소만이 토해내네. 당신이 어떻게?”


경찰서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흐르는 음악은 그녀 내면에 대한 고뇌와 상실을 노래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절박한 소망과 어긋난 욕망을 위로하기도 탓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주문 같은 음악 뒤로 변함없이 무미건조한 공장의 모습을 오래 동안 비추며 영화는 끝을 알린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절망감과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 것처럼.

마지막 엔딩


#영화비평 #성냥공장소녀 #아키카우리스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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