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뱅커 Apr 27. 2024

영화 <소리도 없이>

소리 없이 퍼지는 영화의 숨겨진 가치

영화를 보는 재미... 영화를 읽는 재미...

   흔히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즉, 흥행은 실패했으나 작품성을 바탕으로 시네필들이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대표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 왕가위의 1990년작 <아비정전>, 장준환의 2003년작 <지구를 지켜라>가 있다.(영화 유튜버 라이너의 철학 시사회, 라이너, 중앙books, 2022, p39) 홍의정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 <소리도 없이>가 내게 그런 영화다. 개봉 당시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평단과 시네필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소리도 없이>는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영화다. 묘한 표현이지만 분명 이 영화는 보는 재미보다 읽는 재미가 좋은 남다른 영화다.’


가부장적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절대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감정이입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리도 없이>의 오프닝은 넉살 좋고 사람 좋아 보이는 ‘계란 장수’ 태인과 창복이 초록 속 들판을 달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내 도착한 낡은 건물 속 ‘성실한 땀방울, 내일의 미소’라는 현수막이 그들의 근면 성실함을 애써 알려주는 듯하다. 드라마 <전원일기> 같은 평화로운 시작이다. 관객들은 그렇게 감독이 의도한 설정대로 평화롭게 그들을 바라본다.

    태인은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말이 없다. 창복은 어떤 사유인지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창복이 태인의 형이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동물원의 고릴라와 조련사같이 보이기도 한다.(실제 홍의정 감독은 태인을 연기한 유아인에게 ‘영역을 뺏긴 고릴라’ 같은 연기를 주문했다고 한다) 창복은 태인에게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 ‘기도문을 열심히 들어라’면서 신앙심 깊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라면에 넣을 계란 한 개에는 인색하게 군다. 가족인 듯 남인 듯 그들의 관계에 호기심이 일 때쯤 그들의 진짜 정체가 밝혀진다.

범죄현장의 태인과 창목

    그들은 범죄조직의 살인을 돕고 뒷일을 처리하는 소위 범죄현장 처리 전문가들이다. 범죄와 관련 있는 인물들인 데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한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는 그들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이 죽는 동안 라면을 끓여 먹고, 시체를 유기하고도 죄책감 없는 그들의 삶처럼 말이다. 이웃 할머니에게 계란을 나눠주고, 석양을 등지고 자전거로 퇴근하는 태인의 모습에 보람마저 느낀다. 이 순간 치밀한 감독의 덫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이 두 남자는 성실(마음이 솔직하고 맑고 깨끗한) 하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이다. 카메라와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목소리로 설득시킨다. 그리고 선과 악의 아슬아슬한 경계의 두 남자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만다

아름다운 미장센은 태인에게 감정이입하게 돕는다

    죽은 사람만 맡아 오던 그들은 조직 ‘실장’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늘 분수에 맞게 주어진 일에 감사하는 창복은 자신을 한껏 낮춘 자세로 거절하지만 태인을 위협하는 실장의 압박에 못 이겨 어렵게 수락하고 만다. 나는 이 신 Scene 이 좋다. 창복이라는 입체적인 인물과 태인에 대한 마음은 이들이 마치 한 가족이라고 느껴지게 만든다.

    잔뜩 긴장한 그들이 맡을 사람은 성인 남성도. 무시무시한 범죄자도 아니다. 토끼 가면을 쓴 11살 ‘초희’라는 소녀다. 설상가상 일을 부탁한 실장은 조직으로부터 처단당하고 그들 손에 유기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그들은 졸지에 유괴범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태인이 초희를 맡으면서 그들의 이상한 관계가 시작된다.

토끼가면을 한 초희

    또래보다 더 성숙한 소녀 초희는 유괴범들의 실수로 삼대독자 남동생 대신 납치된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다. 부모는 딸이라는 이유로 초희의 몸값을 깎고, 최선을 다해 자식을 찾지 않는다. 이 영화가 남다른 첫 번째 이유다. 이때 영화는 영리하게 남아선호사상 비판과 페미니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소리도 없이>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관계 중 주도권을 갖는 사람,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는 항상 ‘여성’ 임을 알 수 있다. 약속 장소 위치 설명도 못하는 유괴 컨설턴트(?) 대신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은 다방 여종업원이고, 술 취해 무기력한 경찰(하물며 교복 입은 초희가 핑크색 옷을 입었다고 젠더 편견 적 진술을 한다.) 대신 동료 여경이 초희를 찾아 나선다. 하물며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장기밀매 부부는 누가 봐도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리고 서사가 진행되면서 태인 역시 자기보다 훨씬 어린 초희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초희 부모의 사상처럼 영화 속 남자들은 그렇게 대접받을 만큼 훌륭하지 않다. 기껏 여성의 몸을 훔쳐보거나, 술에 취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 한심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의 무능력을 조력하는 영화 속 여성들을 통해 우리 사회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가부장적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새로운 극적 괘감

    <소리도 없이>는 마치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유사가족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듯한 상황을 만든다. 물론 초희의 탈출 시도는 있었지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의 통과의례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밤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치며 초희를 기다리는 태인의 행동은 그들 사이 교감의 증명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초희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듯한 느낌을 준다. 이때 관객들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기대하게 된다. 그들이 같이 빨래를 하고,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사실은 행복을 가장한 잔인한 행위다)을 보고 있으면 유괴라는 범죄는 잠시 마음에서 오려 두게 된다. 유사가족의 모습을 보이던 그들은 창복의 죽음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창복은 초희의 몸값을 받는 과정에서 실족으로 죽음을 맞는다.

창복의 죽음 '편안히 하늘로'

    바닥에 스러진 창복은 힘들게 계단까지 기어 와 앉은 채 숨을 거둔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느린 틸트 업 (tilt up)으로 계단 아래 ‘꿈꾸는 투어’라는 문구부터 죽은 창복 뒤로 창문에 쓰인 ‘편안하게 하늘로’라는 문구를 잠시 동안 응시한다. 마치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 쇼트는 두려움에 압도당한 창복의 나약함과 자신의 말처럼 분수도 모르게 남의 것을 탐하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넘어진 창복의 후회 섞인 심리를 잘 보여준다.

    한편, 창복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태인은 미리 정해둔 계획 대로 장기밀매 법에게 초희를 넘긴다. 불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태인은 가지런히 걸린 양복을 발견한다. 그 순간 가족을 팔았다는 죄책감인지, 의지하던 존재가 사라진 공허함 인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초희를 구하기로 한다. 늘 창복의 결정에 의해 움직이던 태인 생애 첫 주도적 의사결정 인지도 모른다. 초희를 향한 마음이든, 옮고 그른 것에 대한 깨달음 이든 상관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의 피 묻은 양복’을 입고 선한(?) 행동을 선택한다. 태인에게 양복은 악함 뒤에 숨은 무의식의 판타지이며, 고릴라 같은 자기를 사람처럼 보이게 할 내면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재회한 그들은 미안함과 원망 사이 팽팽한 수평적 감정을 접어두고, 다시 두 손을 맞잡는다. 하지만 초희는 기회가 오자 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우연히 술 취한 경찰을 만나 지만 범죄자로 오인해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다. 동료 여경의 등장으로 가족에게 돌아갈 기회가 다시 생겼지만 초희는 이제 태인을 선택한다. 그렇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과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제 태인은 초희가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 줄 것이고, 그들은 <유랑의 달>(이상일, 2023) 그들과는 다르게 언제든지 만나고, 서로의 인생을 지켜 봐줄 것이다. 이게 우리가 아는 휴면 드라마 장르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유랑의 달

    영화의 마지막은 태인이 초희를 학교로 데려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전히 꼭 잡은 두 손은 그들의 변함없는 관계를 과시하는 듯하다. 담임 선생님을 발견한 초희는 마치 술 취한 경찰의 손을 뿌리칠 때처럼, 꼭 잡은 태인의 손을 뿌리치고 선생님에게 달려가 안긴다. 태인이 누구냐 묻는 선생님의 말에 초희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태인과 우리는 여전히 ‘나를 살려준 고마운 오빠예요’라는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칭찬받고 영웅 대접받을 태인의 모습, 바로 우리가 예상하고 원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초희의 선택은 달랐다. 초희는 태인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자기를 유괴한 태인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제 초희가 태인과의 관계를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초희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것이 아니라 태인이 리우 증후군에 빠졌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태인을 배신한 초희가 얄밉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부모와 조우할 초희의 얼굴이 떠오르는 아이러니와 만난다

태인의 상실

    “뜬금없지만 이 부분에서 <말 없는 소녀>(콤 바이레드, 2023)와 <가라, 아이야, 가라>(벤 애플렉 감독 데뷔작, 2007)가 떠오른다. 영화를 되돌려 보면 초희는 항상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아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남동생과 부모 사이에서 터득한 익숙한 삶의 생존방식 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도 같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에도 한없이 움츠린 영화 속 아이들과 초희를 보니 목구멍이 아파온다. ‘아이의 행복에 부모가 절대적 윤리와 도덕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부모와 가정이라는 세계가 無조건 옮은 것인지, 또는 사회 제도적 구조가 아이들을 보호할 권한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2005)”

(좌)<말없는 소녀>    (우)<가라,아이야,가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예측한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으로 시작해서 범죄물로, 다시 휴먼 드라마에서 범죄물로 서사에 변주를 준다. 이 영화의 두 번째 묘미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들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고자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결과는 다르다. 대중들에게 새로운 장르적, 사고적 지평을 열어 준다. 헤게모니적 서사와 그것을 비트는 서사가 공존하다 충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 영화를 바라보던 무의식의 파괴를 경험한다.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밀물처럼 몰려왔던 희망이 한 번의 썰물로 빠져나간 태인의 상실감을 우리는 아직도 걱정한다. 도망가는 태인은 마치 한 여름밤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양복을 벗어던지고 영화는 마무리가 된다. “남의 것을 탐하면 불구덩이에 빠진다.”라는 창복의 말이 뒤늦게 생각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양복을 입기에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소리도 없이 찾아오는 ‘악의 평범성’

    어쩌면 태인에게 맡겨진 것은 초희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무의식 일지도 모른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것도 초희가 아닌 영화를 보는 우리였을 것이다. 영화는 장르 비틀기. 관점 바꾸기 방식으로 소리 없이 밀려오는 내면의 이중성과 집단 무의식에 따른 윤리적 결함을 비판한다. 한 꺼풀만 벗겨내고 보면 어쨌든 초희는 유괴라는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아닌가? 우리가 평범함 뒤에 숨어 범죄를 일삼는 태인과 창복에게 동화되는 것이 옮은 것인가? 떡잎부터 남다른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리도 없이>가 주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악의 평범성’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저, 1963)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스스로 악한 의도를 품지 않더라도,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여기며 행하는 일들 중 무엇인가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수직관계 세계관에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또는 생계를 위해 양심을 버리는 일도 하게 된다. 직장인이라면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상관의 일방적 지시에 의한 잘못된 업무처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들은 항상 정당한가? 그들은 선한 사람들인가?

    영화는 평범함 뒤에 숨은 범죄 가담자들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괴물은 누구인가? 범죄자 태인인가? 태인을 배신(?) 한 초희인가? 태인에게 감정 이입된 관객인가?’라고 간단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뭐라고 답할 수 있나? 그들의 행복한 삶을 욕망했던 나는... 이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탈감과 동시에 수치심을 느끼며 소리 없이 뒷걸음치고 있다…


단 하나, 아쉬운 그들의 행복한 순간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좋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에필로그다. 꿈인지 지난날인지 모를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는 회상 신이다. 굳이 이 장면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인의 내면인지, 아직도 이런 상상을 하냐고(?) 관객에게 돼 묻는 감독의 조롱이었든 마지막 장면의 무게감과 개연성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차라리 마지막 태인의 클로즈업 쇼트에서 끝이 났어 야 더 많은 이야기가 잉태되었을 것이다. 굳이 에필로그가 필요했다면 <박하사탕>(이창동, 1999)의 그 유명한 기차신처럼 비극적 결말이 더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도망가던 태인이 자기가 타던 계란 장수 트럭과 비슷한 차에 치여 죽으면서 이렇게 회상하는 것이다. 도입부를 재배치한 초희를 만나기 전 넉살 좋고 사람 좋아 보이는 계란 장수 시절의 모습 말이다. 모두가 프리퀄을 원하게 만든 <신세계>(박훈정, 2012) 이정재와 황정민의 그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런 관객의 반응 또한 미리 예측하고, 비틀어 생산적 극화를 도모하는 홍 감독의 치밀한 계산이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영화 <성냥공장 소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