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치 있다고 쳐라" | 그런데 진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게임 속 캐릭터의 여정처럼 나의 일상에도 사이드 퀘스트를 넣어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책 <기분 리셋>에는 삶에 호기심을 더하고, 집중력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방법으로 일상에 '사이드 퀘스트'를 만들어보길 제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게임에서 등장하는 사이드 퀘스트란, 게임의 주된 스토리와는 큰 연관이 없지만 유저가 게임을 더 오래, 재밌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부차적인 퀘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삶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는 큰 관련이 없어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재미를 더해주는 활동'이 될 것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카페에서 작업을 하거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써보는 등 늘 반복했던 뻔한 일을 색다른 방식으로 시도함으로써 일상에 활력을 주는 활동이라면 무엇이든 사이드 퀘스트라고 할 수 있어요.
최근의 저도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을 사이드 퀘스트로 해보았습니다. 꼭 사야 할 필요도 없고,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그 용도가 명확하지도 않고, 그저 심심함을 조금 달래주는 용도밖에 되지 않는 걸 다이소에서 구매해 보았어요. 바로 천 원짜리 종이접기였습니다.
심심할 때 핸드폰을 끝도 없이 들여다보는 대신, 사소하게라도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취미를 갖고 싶어서 다이소의 문구 용품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종이접기인데요. 어릴 때 알약, 우유갑, 음료수 등등 귀여운 도안을 따라서 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만드는 DIY 편지지 만들기를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호기심에 구매해 보았습니다.
천 원짜리 종이접기 시리즈였지만 그 안에는 총 4가지 도안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귀여우면서도 손이 많이 갈 것 같은 '행운 뽑기'부터 만들어보았습니다. 완성된 뽑기 판에는 총 9개의 뽑기 종이를 붙일 수 있었는데, 뽑기 종이 속에 무슨 내용을 적을지 고민하다가 오늘 하루의 재미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작은 미션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챗지피티에게 일상이 무료하지 않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하거나,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는 활동, 실용적이면서도 흔하지 않고 참신한 활동을 제안해달라고 부탁한 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하나씩 종이에 적어보았어요. 그 이후에는 어떤 종이에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종이를 무작위로 섞은 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뽑기 종이 하나를 골라보았습니다.
첫 번째 뽑기 종이에는 이런 미션이 적혀있었습니다.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그 안의 문장으로 오늘의 다짐 정하기" 어떤 책을 골라도 상관없겠지만 왠지 실용적인 조언이 많이 적혀있을 것 같은 자기 계발서에서 문장을 하나 골라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재밌게 읽었던 책 <잘 됐던 방법부터 버려라>와 함께 오늘의 사이드 퀘스트를 실천해 보기로 했어요.
무작위 페이지 속에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쳐라."라는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일단 자신의 모습에 대한 판단은 내려놓고 그저 '이게 나지'라는 중립적인 자세로 스스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문장이었어요.
좋은 문장이긴 하지만, 이걸 오늘의 다짐으로 삼으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일을 나에게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재밌는 영화, 한적한 카페에서 마시는 맛있는 커피, 자연을 보러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 값비싼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꼭 돈을 쓰는 것으로만 무언가가 가치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요즘 저는 불필요한 지출이나 맛있는 간식으로 얻는 도파민 대신 다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다른 질문도 던져보았어요. "요즘 세상에서 가치 있는 건 무엇이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결여되었고, 그래서 어느 때보다 가장 귀해진 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 그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살아가면서 마주한 수없이 많은 사람, 사건, 환경, 경험 중 '내가 지금의 내가 되도록 이끌어준 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말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저라는 사람의 고유한 형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특별하다고 말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사용자의 관심사에 맞춰 편집된 편향된 정보로 가득한 알고리즘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떤 정보가 내게 정말로 중요한지 파악하기란 매우 까다롭습니다. 게다가 무엇이든 매끄럽게 편집할 수 있고, 그럴듯하게 보여줄 수 있고, 때로는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 또한 너무나도 쉬워진 바람에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나 공백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란 말도 안 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항상 아름답게 끝나지 않고 때때로 상처나 불신을 남기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 또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근본이 되었다는 걸 말하는 용기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보기 좋은 모습만 잘 편집해서 보여줄 수 있지만 그래도 나의 과거가 내가 그동안 바라왔던 나의 모습과는 다를지는 몰라도 그것 또한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이런 상처 한두 개쯤은 우리 모두가 달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아픔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우리 모두 이해한다는 걸 솔직하게 보여주는 취약성이 지금의 저에게는 가장 가치 있습니다.
그러니 본래의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쳐라"라는 책 속 문장을 오늘의 다짐으로 정하려면 제게 상처가 되었던 것까지 포함해서 무엇이 저를 저로서 만들었는지 돌아보고 이를 포용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선 저는 걱정스러운 점도, 부끄러운 점도 너무 많아 모든 면에서 솔직해질 수 없다는 점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항상 그럴듯한 사람이지도 않고, 허세를 떠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쪽이 익숙하고, 실수도 시행착오도 당연하게 만들어내는 엉성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인지하는 것도 좋은 시작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모든 면에서 솔직해지지 않더라도 저를 저로서 만들어준 것은 너무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읽은 판타지 인소, 로알드 달, 이사카 코타로, 00년대의 팝펑크/이모 밴드, 온라인 게임, 투니버스, 연습장에 썼던 수많은 이야기, 앞뒤로 글과 그림이 가득한 편지지, 고향, 시골, 도시, 한국, 외국, 학교 앞 문방구에서 먹은 간식, 주말에 먹은 피자, 한적한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들, 학교, 사회, 그 외에 자질구레한 여러 요소들이 제게 얼마큼 중요했는지 어떻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집중의 방향을 오직 '나'에만 한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만들어준 '관계'로 넓히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많아도 우선 이 말부터 해보고 싶어요. 굳이 나누지 않아도 상관없을 텐데도 기꺼이 자신의 몫을 나눠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제가 자라났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공유해 준 상상력, 열정, 애정, 위로, 공감, 우정, 연민, 응원이 저의 세상이 자랐다고 말이에요. 일단 여기서부터 한 발짝 나아가 봐도 괜찮다고 제게 전해보고 싶네요. 자신에게 건네는 관대한 포용이 언젠가는 타인을 향한 너그러운 포용으로도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