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부할 시간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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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큰 다짐과 함께 교재도 구매했다. 가격은 만 원밖에 되지 않지만 속은 알찬 교재였고, EBS에서 만든 교재기 때문에 큰 신뢰감도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계획대로 공부할만한 시간이 없는데."
사실 영어 공부를 위해 교재만 구매한 건 아니었다. 교재에 있는 내용을 모조리 우적우적 씹어 삼킬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도 함께 마련했다.
시간 맞춰서 꼬박꼬박 강의 듣기
원어민 성우의 녹음파일 n번 듣기
셰도잉 n번 연습한 뒤 녹음하기
한글을 영어로 영작하기 등등...
예전에도 오랫동안 지속한 적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그때도 어느 정도 해낸 계획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는 명백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은 이러하다.
1. 예전에는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게다가 내가 이 거창한(?) 영어 계획 플랜을 지속했을 시기는 방학 때였다. 해야 할 일이라곤 고작 자격증 공부하기와 실컷 놀기 두 가지밖에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플랜이었다는 걸 미처 몰랐다.
학생이 아니더라도 아주 잠깐 시간만 내면 거뜬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꾸준히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일, 반면에 설렁설렁해도 크게 손해보지 않는 일 (=영어) 중 내가 선택할 건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하느라 영어 공부할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다.
2. 예전에는 동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예전부터 썼던 다이어리에 적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바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외국어 공부를 지속해야 한다는 강렬한 동기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영어 공부를 가장 우선순위로 놓을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릴 적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언제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만큼 해외 생활을 간절하게 원하지도 않는다.
3. 예전에는 함께할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에서 직장을 잡으려면 일단 영어를 잘해야 한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주변에 있는 모든 지인들이 방학이 시작되든 새 학기가 시작되든 늘 토익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목표했던 토익 점수를 갖고 있거나 토익 점수가 전혀 필요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혼자서도 뭐든 잘할 줄 아는 독립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능률이 훨씬 많이 오르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일뿐만 아니라 영어공부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하려니 할 맛이 안 났다.
24시간 중
영어 공부하기
가장 좋은 시간?
앞서 열거한 세 가지 이유 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첫 번째였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언제 유용하게 쓸지 모르는 영어공부까지 각 잡고 하기에는 다른 곳에 소요해야 할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들었다. 진짜로 시간이 없는 건가? 시간이 없다고 착각하거나 핑계를 대서 영어 공부 대신 실컷 놀려는 속 샘인 건 아닌가?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타임 블록 시스템을 내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타임블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가 한 일을 또 다른 작은 블록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언제, 얼마큼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스톱워치와 타임 블록 기능이 함께 있는 어플을 다운로드하였다. 할 일을 카테고리로 만들고 스톱워치 버튼을 누르면 그 시간만큼 달력에 표시되는 어플이다.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추가한 뒤 그 시간이 얼마큼 소요되는지 측정했다. 스톱워치를 실행하는 걸 까먹은 일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나온 나름대로 합당한 추리를 바탕으로 얼추 시간을 짜 맞추었다.
이 하얀 건 다 뭐야?
제대로 측정해 본 나의 하루는 황량했다. 집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중간중간 가졌던 쉬는 시간들이 엄청난 부피를 차지하는 텅 빈 블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건 다 핑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혹은 하루만 지나도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TV나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들인 시간은 매우 많았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의 삶은 24시간이라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졌건만 나는 그걸 쪼개고 쪼갠 뒤에 나의 인생 목표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보내고 있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영어 공부하기 딱 좋은 시간을 굳이 찾을 필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왜 목표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시작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는 것마저도 추가로 알았다.
그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머릿속에 넣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시간이 없다, 할 수가 없다는 말 대신 어떻게든 해내려고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24시간이라는 시간의 일부를 텅 빈 블록으로 만들어버린 후에야 뒤늦게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