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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담을 쓰레기통이 필요해

오늘은 감정의 분리배출이 필요할 때

by 현의

내 인생에도 쓰레기통이 필요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하루의 감정을 훅훅 쏟아버릴 쓰레기통이 필요하다.


모두 이런 순간을 한두 번씩 겪었을 것이다. 짜증 나는 감정을 도대체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서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배출하지 못하고 담아두다가 병이 나는 경우. 혹은 역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뒤집어 쓰는 쓰레기통이 되어본 경험도 숱하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갈 곳이 정해진 쓰레기가
부러워진 적은 처음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좀 더 어릴 때만 해도 나는 화를 확실히 내는 사람이었다. 어중간하게 기분 나쁜 티를 내거나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게 좀 더 현명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랑이는 말을 해봤자 상대방이 내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는 걸 어릴 때부터 깨우쳤다. 처음부터 만만한 사람 취급받지 않는 게 인생을 살아가기에 훨씬 편하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의사표현을 정말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오직 내 감정만을 따르는 고집스러운 태도를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연애나 결혼을 할 목적으로 유해진 건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나 친구, 지인, 하다못해 사회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마저도 내 인생에 어떻게든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주위에 있는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내게는 이런 생각의 전환마저도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큰 변화였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내보였던 숱한 감정들을 조금씩 감추는 방법을 익힐 때였다. 상대방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고, 하지 못했던 행동을 후회하면서 알게 된 건 ‘나는 내 감정을 다룰 방법을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쓰레기마저도 한 곳에 버려두면 며칠 뒤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데 왜 감정은 그러지 못할까. 감정은 쌓아두면 병이 나고 버리면 후회한다. 또한, 홧김에 보낸 카톡,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 훗날 읽게 되면 창피할 정도로 적나라하고 불쾌한 문장이 쓰인 글 등등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다가 후회하게 되는 방법도 갖가지였다.



감정의 배출 방식을
다시 설정해볼까



여러분 중에는 아예 화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여태 부처나 예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매사에 긍정적인 면만 보면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눈곱만큼도 우월하지 않다는 걸 모른척하고 자신의 토대가 될 타인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일까?’, ‘그들이 늘 찾고 있는 자존심이 다른 사람 없이는 전혀 얻을 수 없는 거라면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아직까지도 나는 이런 생각을 떼어내지 못했다. 어떤 세상에서든 차가운 면을 보는 재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은 마음속의 화를 버려두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딱히 화를 해소할 방법을 모르다 보니 어쩔 때는 아무 이유 없이 짜증 이나기도 했다.


어떤 감정을 갖는데 이유가 있으면 그걸 해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때면 막막하다. 이번 주의 내가 그랬다. 어떻게 이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고민만 더 늘어났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주말이라 잠을 실컷 잤는데도 피곤했고 뭘 해도 기분전환이 되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사소한 요소를 하나하나 짚어보며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찾아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갑 하나만 챙기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집에 있는 쓰레기를 버릴 때와 마찬가지로 내 맘에 쌓아둔 감정의 쓰레기도 역시 밖에 나가야만 제대로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시원한 커피... 가 아닌
청량한 레모네이드



배차 시간이 희한한 버스를 30분이 넘게 기다린 후 20분 동안 버스를 탔다. 목적지인 도서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읽고 싶었던 책을 빌리고 밖에 나오니 겨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는데 근처에 있는 모든 카페는 빈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또 배차시간이 희한한 버스를 기다려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충동적으로 한 정거장 일찍 내렸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카페 안에 무작정 들어갔다. 평소라면 깔끔하고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골랐겠지만 가성비 없는 레모네이드 한 잔을 주문했다.


길쭉하고 투명한 유리컵 아래에 샛노란 레몬청이 바닥에 잔뜩 깔려있는 게 보였다. 빨대로 컵을 휘저으니 탄산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보글거렸다. 장식용으로 올려놓은 레몬 한 조각을 살살 피하고 빨대가 바닥에 남아있는 레몬청을 정확하게 빨아들일 수 있도록 조정한 뒤 한 모금 마셨다.


자양강장제가 따로 없었다. 이유 없이 피곤해서 반쯤 감겨있었던 눈이 떠졌고 평소에 잘 먹지 않았던 탄산이 갑자기 몸에 들어오니 속이 개운해졌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레몬이 부족했기 때문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마셨던 레모네이드 한 잔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려면 일단 쓰레기봉투를 장만해야 한다.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어쩌면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사소한 순간이 내 부정적인 감정을 내버릴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쓰레기봉투가 될 가능성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 없이 밖을 배회하느라 생긴 피곤함과 짜증을 딱 한 잔의 레모네이드가 훌렁 들고 가 버린 걸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마주할 순간순간마다 내 인생의 쓰레기봉투, 쓰레기통이 될 것은 또 무엇일까? 내 인생에도 부정적인 순간을 담을 쓰레기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앞으로의 삶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감정 쓰레기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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