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늘 엉망이다
비 오는 날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다르다. 눈을 뜨자마자 맞이한 풍경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새로운 하루가 아니라 이미 다 저물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날처럼 보인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할까'로 시작되는 설렘을 뺏기고 '나는 여태 뭘 했지'라는 자조적인 물음만 떠오르는 늦은 밤이 생각나는 하늘. 그것이 아침부터 나의 열정을 쏙 빼앗아갔다.
흐린 하늘의 징크스?
나이가 들면 비 오는 날에 더 아파진다고 한다. 공기 중에 가득 찬 습기가 뼈 마디에 영향을 준다나 뭐라나. 비 오는 날과 관련하여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론은 바로 '비 오는 날에는 기분이 축 처진다'이다. 이건 굳이 과학적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이 누군가의 뼈 마디에 욱신거리는 아픔을 남긴다면, 나의 영혼에는 아주 무겁게 엉겨붙는다. 까끌한 콘크리트에 질질 끌려다닌 영혼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돌아올 때쯤에는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남는다. 그 생채기는 때때로 지난날의 아픔을 떠올리게도 하고, 혹은 현재의 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금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흐린 하늘에 영향을 받는 건 내 영혼뿐인데 어느덧 나는 모든 신체가 훼손된 것처럼 행동한다. 쉽게 웃지 않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움푹 파인 콘크리트 바닥에 고여 있는 빗방울처럼 한 자리에 꼼짝 않는 것이다. 평소의 나와는 매우 다른 행동이다.
비 오는 날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한 기대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를 핑계 삼아 늘어져 있는 나도 이해하려고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계획대로 살아. 이렇게 늘어질 수도 있지"
하지만 외부의 상황은 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꼭 해야 하는 일, 지금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일 등등. 이것들은 내가 남들에게 이해받는 학생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라는 걸 늘 상기시킨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과 절대로 뒤로 미룰 수 없는 일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
이런 일을 수차례 겪다 보며 터득한 나만의 정답이 있다. 꼭 끝내야 하는 일의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둘 때까지 일을 미루고 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남들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하는 성격과 자존심 강한 성격,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고집스러운 성격이 제대로 합쳐져서 강력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보다 할 일을 제시간에 해내지 않을 때 더 큰 상실감과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성격 때문에 흐린 날씨 때문에 한없이 게을러지는 마음을 꽤 잘 추스르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촉박한 시간 안에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너무 많은 스트레스 때문에 일을 다 끝내고 난 뒤에도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을 달고 살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오는 걸 어쩌겠는가. 나는 내 인생은 내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천재지변까지 내가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저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를 어떻게든 제대로 움직일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비록 게으름과 책임감, 즐거움과 부담감을 모두 제대로 처리한 뒤에 남는 건 머리가 둘로 쪼개질 것만 같은 두통뿐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두통과 함께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하늘이 흐리든 어쩌든 나와 상관없다는 듯 여유 부리다가 뒤늦게나마 이렇게 동동거린다. 하지만 비가 언제까지고 오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날이 맑아지면 오늘 빼앗긴 열정과 활기를 다시 돌려받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언제까지고 현재의 기분이 나의 태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