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도 없던 깜지를 시작하다
EBS 외국어 방송 입이 트이는 영어로 새벽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이제는 새벽 기상에도 익숙해진 덕분에 매번 오전 9시나 오후 1시에 짬을 내서 듣곤 했던 방송도 아침 6시 40분에 정기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고, 심지어는 방송 듣는 걸 빼먹기도 했던 지난 세월과 비교했을 때와는 극명하게 다른 변화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점진적인 성취와 매일 마주하게 된다면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마음 놓고 나 자신을 칭찬하기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바로 나는 너무 사소한 일에도 나를 대견해한다는 것이었다.
느긋한 성격은
공부할 때
도움이 안 된다
나도 예전에는 나에 대해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강 실루엣이 보이긴 한다. 나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일을 처리하기보다 일단 해본 뒤에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일에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숱하게 겪으며 실수나 미숙함을 만천하에 계속 드러낸 탓인지, 아니면 느긋한 천성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계속되는 실수에는 신경을 덜 쓰고 일단 뭐라도 해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한다.
이런 느긋한 성격은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고자 할 때 그리 큰 추진력을 내지 못한다. 솔직히 지난 한 달간은 영어 방송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할 일은 다 해낸 것이라는 여유만만한 자세로 영어 공부에 임했다. 그 결과 매일 방송을 들으며 꼼꼼한 필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시간을 내서 예습이나 복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나는 본문 내용이 별로 없다.
사실 이건 이만큼의 글을 쓰면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복습을 안 해서 영어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면, 복습을 잘해서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아마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테니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앞으로 뭘 할 건지 계획도 없고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모범생처럼 철저한 예습, 복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매우 큰 시너지를 주는 느긋한 성격 때문에 지난 한 달의 공부는 내게 아리송한 결과를 주었다.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결과.
더 많은 도전을 해도 괜찮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과 그냥 되는대로 살고 싶은 느긋한 생각이 격렬하게 충돌할 때였다.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노션 어플에 들어가 배운 내용을 정리하던 도중 충동적으로 입트영 교재 본문에 있는 지문을 줄줄이 타이핑했다. 그 전에는 내가 모르는 표현이나 핵심 문장만 기록했었는데 그 날은 지문 내용을 일일이 파헤쳐서 정리하는 것조차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지문을 전체적으로 타이핑하니 전체 지문의 문장 구조가 오히려 더 잘 보인 것이다. 교재와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보면서 문장을 한 줄 한 줄 타이핑하다 보니 오히려 이전보다 지문을 훨씬 많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처음부터 지문을 필사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는 문장만 쏙쏙 뽑아서 한 번에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느긋한 성격 때문에 영어 공부를 자꾸 뒤로 미루기만 했던 내게 이 방식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정리해도 어차피 지난 한 달 동안 쳐다도 안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우연히 시도해본 필사 때문에 영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나온 노란색의 5월호 교재를 구입하면서 이번 한 달 동안은 영어 방송을 듣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지문 필사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5월이니까 5회가 적당할 것 같아서 본문 내용과 뒷장의 짧은 대화문을 한 세트로 총 5번 필사하기로 했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벌로 주었던 깜지 쓰기를 성인이 된 후에 자발적으로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오늘은 5회 필사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인데, 왜 선생님들이 깜지 쓰기를 벌로 주었는지 하루가 갈수록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어릴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체력 때문에 고작 가만히 앉아서 글씨를 쓰는 것뿐인데도 다 하고 나면 이상하게 진이 빠지기도 한다.
사실은 아직도 조금 더 늘어지고, 조금 더 여유로워지려는 충동이 들기도 한다. 정말로 이런 걸 해봤자 지금 당장 내 삶이 변화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쉽게만 살았던 만족스러운 하루에서 살짝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에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사소한 일에도 나를 대견해하니까. 여유로운 천성은 어디 가지 않겠지만 오늘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도전을 당분간 꾸준히 지속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