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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의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 MZ세대로 살아남기

아날로그의 비완벽함을 사랑하게 되다

by 현의

메타버스 시대에 발맞추어 이프랜드, 제페토, 게더타운 등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는 모든 세대를 존경한다.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누구보다 발 빠르게 변화에 대응하는 분들이니까.


나도 디지털이 참 세련된 데다 합리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디지털에 기회와 돈이 모여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냥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날로그가 주는 감성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감성을 잊지 못하는 MZ세대로서 나는 아직도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다.


1) 굿노트 다이어리 혹은 노션 다이어리가 정리에 최적화된 도구인 걸 알면서도 불렛저널 다이어리에 손으로 직접 필사를 할 때 가장 즐겁다.


2) 밀리의 서재나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면 무거운 종이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서점에 직접 가서 종이책을 구매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3) 아이폰을 하루 종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도 아이폰 메모 어플 대신 포스트잇에 할 일 목록을 작성한다.


4) 아이패드와 애플펜슬, 심지어 로지텍 키보드까지 다 구매했으면서도 사은품으로 받은 종이 다이어리를 들고 다닌다.


5) 스트리밍 어플을 매일 사용하면서도 카세트테이프와 cd를 수집한다. 언젠가는 멋들어진 턴테이블도 장만해서 비틀즈 lp를 모조리 소장하고 싶다.


왜 굳이 불편하고 수고스러운 아날로그로 삶을 채우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의 대답을 이 한 문장으로 답할 수 있다.

아날로그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감각을 통해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종이에 남긴 기록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잘 보이는 곳에 놓고 가끔씩 손으로 종이를 만져볼 수 있다. 손끝에 신경을 집중하면 종이의 오돌토돌한 질감도 느낄 수 있다. 형광펜이 지나간 자리를 만져보면 매끈함이 느껴진다.



카세트테이프나 cd에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감싼 비닐을 뜯어내는 재미가 있다. 매끄러운 비닐을 신중하게 벗긴 뒤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비닐을 구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cdp나 오디오에 주섬주섬 무언가를 끼워 넣는 과정은 미끈한 액정을 톡톡 누르는 행위보단 수고스럽긴 해도 참 남다른 경험이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다이어리를 나만의 이야기로 채워 넣는 경험은 또 얼마나 보람찬가. 무한한 것처럼 느껴지는 공백을 나만이 가진 글씨체로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필기감이 좋지 않은 펜을 쓸 때 겪는 손목의 통증, 연필을 쓸 때 들을 수 있는 사각거리는 소리까지 아날로그 글쓰기가 주는 감각은 정말 다양하다.



어쩌면 내가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날로그의 비 완벽함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흠집이 나기도 하고, 완전히 고물이 되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일정하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 그 자체 아닌가. 혼자서 모든 걸 깔끔하고 완벽하고 정돈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늘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고, 늘 정기적으로 나를 관리해야 하고, 가끔은 나를 더욱 잘 다룰 수 있는 설명서를 직접 찾아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날로그를 쓸 때마다 내가 정말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다.


평생의 꿈이었던 유튜버 도전을 디지털 도구인 노션 템플릿 공유로 시작했으면서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좀 멋쩍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시대에 따라 점점 구식이 되는 것 또한 아날로그적인 면이 아닌가? 아날로그적이고, 인간적인 지금 내 모습이 그래서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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