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잔혹함:『인생의 베일』

부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과 사랑의 역설

by 설탕바른위로

이 글은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감정수업』을 길잡이 삼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중 10가지 감정을 소설과 함께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인문학 연재입니다.


[1부] 사랑이 잔혹함으로 변하는 순간

:배신의 칼날을 겨누다


당신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라는 잔혹한 말을 내뱉어 영혼을 죽여본 적이 있습니까?


1925년,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도 서글픈 심연을 그린 소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


주인공은 허영심 가득한 여성 키티와 그녀를 짝사랑해 결혼한 세균학자 월터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묻는 것은 단순한 불륜이나 치정극의 결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이 거부당했을 때, 그리고 그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잔인함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잔혹함의 정의: 사랑하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는 욕망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기이한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 스피노자의 차가운 통찰에 기대어 보겠습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잔혹함을 미움이나 증오의 대상이 아닌, 역설적으로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향하는 감정으로 정의합니다.


잔혹함 (crudelitas)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왜 우리는 기쁨을 주는 존재에게 고통을 주려는 욕망을 느낄까요? 이 역설 속에 사랑이 잔혹함으로 변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잔혹함은 사랑하는 이에게 해악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스스로 제거하거나 포기하는 행위와 같으며, 본질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모순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허영심의 결혼: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비극의 씨앗은 사랑 없는 결혼에서 잉태되었습니다. 1920년대 런던, 주인공 키티 가스틴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들을 부유한 귀족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키티 역시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하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스물다섯이 되도록 적당한 혼처를 찾지 못하던 중, 자신보다 못생겼다고 여겼던 여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되자 키티는 극심한 불안감과 패배감을 느낍니다. 바로 그때, 홍콩에서 휴가차 런던에 온 의사이자 세균학자 월터 페인이 그녀에게 청혼합니다.


월터는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키티를 깊이 사랑했지만, 사교계의 화려함을 쫓던 키티의 눈에 그는 그저 따분하고 매력 없는 남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키티는 어머니의 압박과 '동생보다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월터와 도피하듯 결혼하여 홍콩으로 떠납니다.


권태와 배신: 환상을 쫓는 불나방


홍콩에서의 삶은 키티에게 지루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정부 세균학자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가 사교계에서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월터는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키티는 그의 지적인 대화나 취미를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그때 그녀 앞에 찰리 타운센드(Charlie Townsend)가 나타납니다. 홍콩 총독부의 차관보인 그는 잘생긴 외모와 능숙한 사교술, 그리고 테니스와 폴로를 즐기는 호남형 남자였습니다. 월터와 정반대인 찰스에게 키티는 순식간에 매료되었습니다. 찰스에게는 아내가 있었지만, 그는 홍콩 사교계의 소문난 바람둥이였습니다.


키티는 찰스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고, 급기야 월터가 집을 비운 사이 침실에서 불륜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키티는 이 위험한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 혹은 찰스가 자신을 위해 아내를 버릴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진실을 가리는 화려한 '베일'에 불과했습니다.


파국과 잔혹함의 폭발: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어느 날, 닫혀 있어야 할 침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월터는 두 사람의 배신을 목격합니다.


며칠간의 숨 막히는 침묵 끝에 월터는 키티와 마주 앉습니다. 자신의 외도가 발각되었음에도 키티는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인 잔혹함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도가 천박한 육체적 욕망이 아닌 '운명적 사랑'이었다고 강변합니다.


궁지에 몰린 키티는 월터의 가슴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말을 무기처럼 휘두릅니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우리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잖아. 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죄다 지루하기만 해."


이것이 잔혹함의 작동 방식입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 키티의 이 말은 월터의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침착하고 배려심 깊었던 월터의 입에서, 이제껏 억눌러왔던 비통한 진심이 잔인한 고백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월터의 잔혹함은 키티보다 더 깊고 처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키티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지성과 품위를 숨기고, 그녀의 천박한 수준에 맞춰 '연기'하며 살아왔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했어"라는 말 뒤에 붙은 경멸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배신해야 했던 한 남자의 자기혐오였습니다.


월터는 이 훼손된 사랑을 끝내기 위해 키티에게 냉혹한 최후통첩을 합니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중국의 오지 '메이탄푸(Mei-Tan-Fu)'의 의료 책임자로 자원했으니 함께 갈 것.


만약 가지 않겠다면, 찰스 타운센드가 아내와 이혼하고 키티와 결혼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준다는 조건 하에 이혼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키티는 찰스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뛸 듯이 기뻐하며 찰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녀는 이것이 월터의 덫인 줄도 모른 채, 환상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내일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오늘의 질문

Q. 혹시 오늘 하루, 자신의 잘못이나 미성숙함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에게 "난 원래 그래" 혹은 "네가 문제야"라며 방어적인 잔혹함을 보이지는 않았나요?


Q.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당신의 '알량한 자존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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