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고백, 그리고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이 글은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감정수업』을 길잡이 삼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중 10가지 감정을 소설과 함께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인문학 연재입니다.
핍은 자신의 후원자가 미스 해비셤이 아닌 죄수 매그위치임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사랑한 고귀한 에스텔라가 사실은 매그위치와 하녀 몰리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까지 밝혀집니다.
핍은 재거스를 찾아가 따져 묻습니다. 재거스는 그제야 냉소적인 태도로 진실을 인정합니다.
과거,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몰리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재거스는 몰리가 처벌받게 되면 그 아이 역시 범죄자의 자식으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마침 아이를 원하던 미스 해비셤이 있었기에, 재거스는 몰리의 아이를 몰래 빼돌려 미스 해비셤에게 입양 보낸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에스텔라였습니다.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핍이 숭배했던 ‘공주님’ 에스텔라는, 사실 핍이 가장 혐오했던 범죄자 매그위치와 살인 혐의자 몰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가장 고귀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비천한 것에서 나왔다는 이 역설.
이것은 핍이 가지고 있던 ‘신분과 계급에 대한 환상’을 박살 내는 결정타였습니다.
핍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매그위치는 핍을 만나기 위해 사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만든 '신사 아들'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핍은 처음에는 그를 혐오했지만, 점차 그 투박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견합니다. 매그위치는 자신의 친딸(에스텔라)이 살아있는 줄도 모르고, 핍을 양아들처럼 여기며 평생을 바쳐 헌신했던 것입니다.
핍은 매그위치를 영국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매그위치가 잡히면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기 때문에 핍은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의리이자 연민이었습니다. 탈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매그위치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감옥 병동에서 죽어가는 매그위치 곁을 지키며 핍은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당신에게는 잃어버린 딸이 하나 있었지요. 그 딸은 살아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고, 제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매그위치는 평생 가슴에 묻었던 딸이 살아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핍의 손을 잡고 평안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습니다. 핍은 죄수의 딸을 사랑했고, 죄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이제 그에게 신분이나 계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매그위치의 죽음과 함께 핍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막대한 빚만 남았습니다. 쓰러진 핍을 구하러 온 사람은 런던의 친구들이 아닌, 고향의 대장장이 매형 조였습니다. 조는 핍의 빚을 갚아주고 그를 간호한 뒤 조용히 떠납니다. 핍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좇았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은 허상이었으며,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 준 조의 마음이야말로 진짜 유산이었음을요.
세월이 흘러 핍은 성실하게 일하여 빚을 갚고, '새티스 하우스'의 폐허를 찾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에스텔라와 재회합니다. 에스텔라는 돈만 보고 결혼했던 남편에게 학대받고 사별한 뒤, 오만함이 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일로 인해 굽혀지고 부러졌어요. 하지만 굽혀지고 부러진 곳에서 더 좋은 모양이 만들어졌기를 바래요."
두 사람은 폐허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친구가 됩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로 성공했지만, 내면은 공허했던 찰스 디킨스 자신의 고통스러운 고백록이었습니다.
소설 속 핍이 가난을 그토록 수치스러워했던 이유는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디킨스의 아버지는 빚을 갚지 못해 채무자 감옥에 갇혔고, 12살의 디킨스는 학교 대신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습니다. 어린 디킨스에게 가난은 공포였고, 노동자 계급으로 추락한다는 것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그는 평생 이 사실을 숨겼으며, 소설 속 핍을 통해 자신의 속물근성과 수치심을 고백하고 치유받고자 했습니다.
소설 속 차가운 에스텔라는 디킨스가 중년에 사랑에 빠진 18세의 여배우 엘렌 터넌(Ellen Ternan)의 투영입니다. 디킨스는 45세의 나이에 27살 연하인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로 인해 20년 넘게 산 아내 캐서린과 별거하게 됩니다. 특히 에스텔라가 '비밀스러운 출생(매그위치의 딸)'을 가진 것으로 설정된 것은, 디킨스가 엘렌 터넌과의 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던 답답한 현실과 겹쳐집니다.
디킨스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Great Expectations), 내면은 공허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사회가 약속하는 성공을 손에 넣어도,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는 핍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돈은 사랑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스피노자는 희망을 '불확실한 기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핍은 돈이라는 확실한 수단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했지만, 그것은 가짜 희망이었습니다. 진짜 희망은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 속에 있었습니다.
디킨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당신의 희망이 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재거스가 설계한 가짜 성공의 미로입니까, 아니면 핍이 마지막에 도달한 진실한 마음의 밭입니까?
당신의 삶에서 핍의 '매그위치'나 '조'처럼, 겉모습은 초라하거나 투박해 보여도 당신을 진심으로 지탱해주고 있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만약 당신이 바라는 경제적 성공이 내일 당장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내면에 남을 '진짜 유산'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