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의사말, 환자는 환자 말

24. 미친 상상력을 제어하는 분별력을 지녀라.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1부 인간의 위대함은 운이 아니라

미덕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미덕

24. 미친 상상력을 제어하는 분별력을 지녀라.

상상력을 다스리라. 어떨 때는 상상력을 바로잡고, 또 어떨 때는 상상력을 북돋워야 한다. 행복은 상상력에 달렸고, 이것은 지혜까지 통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뿐만 아니라, 기절할 정도로 좋은 모험을 제안한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신데레시스 로 상상력을 다스리지 않은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신데레시스: 선을 인지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성향)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이성과 지성의 능력을 말한다. 이성의 오류를 바로잡고 민감한 욕망을 지배하여 ‘양심의 불꽃’이라고도 불린다. 저자가 말하는 ‘분별력’이란 ‘판단력’,‘양식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몸이 변해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의식을 잃었던 그날 이후, 항암치료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앞선다. 너무 무섭다. 깨어나지 않으면 정말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말한다. 몸이 비교적 괜찮을 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손톱은 빠질 것 같고, 발은 아기 발처럼 퉁퉁 부었다. 무릎까지 차가운 통증이 스며든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느낌이다. 허리 위로는 땀이 흐르는데, 허리 아래는 한겨울이다.


이번엔 수첩에 증상을 꼼꼼히 적었다. 응급실에 갔던 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가정 간호사에게 영양제 처방을 요청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중요한 건 위내시경과 피검사 결과에 따라 항암이 가능한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부작용보다도, 위에 큰 이상이 없어야 항암 일정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현실이다.


오전 10시 30분, 병원 대기석에 있으라는 문자가 왔다. 서둘러 진료실로 갔다. 내 이름이 불렸다. 위내시경 결과부터 물었다. 위염이 있으나 항암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뿐이다. 피검사 결과도 같았다. 나는 항문에서 피가 난다고 증상을 전했지만, 의사는 ‘당분간 경과를 보자’는 말만 남겼다. 항암제 투여량을 줄여 부작용이 완화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결국 의사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나는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했다.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받았다. 기대했던 영양제 처방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실망스러웠다. 환자의 말을 반영해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진료를 받았다. 먹지 못한다고 여러 번 말해도, 의사의 머릿속엔 영양제라는 단어가 없는 듯했다. 이유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작용을 감내하면서도 항암 일정은 지켜야 한다. 세상에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닐까 싶다가도,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만 했더라면 치료 일정을 온전히 이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환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비슷한 환자가 15개월 뒤 일상으로 복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던 중, 예전에 알고 지내던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회사에 가지 않아 휴직 중임을 들었다며, 신간 책을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암 투병 중이라는 말을 꺼내자, 상대방도 유방암을 앓은 환자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저녁에 다시 전화가 왔다. 항암 치료를 몇 번 했는지 물어보니, 무려 34번, 2년 동안 했다고 한다. 듣고 나서 ‘헉’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들이 너무도 벅차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더 긴, 더 고된 시간을 버텨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용기를 준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처방받은 약을 잘 먹고, 잘 쉬는 것.

그게 지금의 나를 위한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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