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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 있는 글씨는 못 읽겠다는 말

by 또 다른세상

받침 있는 글씨는 못 읽겠다는 말

새벽이면 엄마는 늘 동화책을 펼쳐 노트에 필사를 한다. 그 모습은 감탄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처음 책을 건넸을 땐, 엄마가 쓸 줄 아는 글씨라고는 이름 석 자뿐이었다. 글씨체는 삐뚤빼뚤했고, 손에 힘도 없어 겨우겨우 적어내는 수준이었다.


얼마 전, 두꺼운 노트를 다 썼다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몇 달을 꾸준히 써 내려간 노트 속에는 엄마의 의지와 끈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몸 상태가 괜찮은 날엔 새벽 시간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 하지만 요즘은 항암 부작용으로 오래 앉아 있을 수조차 없다. 손끝, 발끝, 다리까지 통증이 심하다. 무리하면 더 큰 고통이 따라오니, 조심스럽게 몸의 신호를 살피며 조용히 움직인다. 식탁에 앉아 묵묵히 책을 베껴 쓰는 엄마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처음엔 받침 없는 글자만 간신히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단어 뜻도 모르고 문장 전체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해 답답해하셨다. 금세 책 읽기를 포기하셨고, 나는 조심스레 필사를 먼저 해보시라고 권했다. 제법 두꺼운 노트를 한 권 건넸다.


어제는 엄마가 책을 읽으며 글씨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여기 한 페이지 읽어보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엄마는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갔다. 단어를 넘기고, 문장을 이어 읽는 모습이 신기하고 뭉클했다.

"이제 책 잘 읽으시네요. 엄마, 정말 대단해요."
내 말에 엄마는 "받침 있는 글씨는 아직도 잘 못 읽겠어." 하시며 쑥스러운 듯 웃으셨다.


그 순간, 느릿하지만 꾸준히 거북이처럼 성장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 새벽, 엄마는 책과 노트를 펴놓은 채 앉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가끔 나를 바라보셨다. 책 읽는 것을 도와달라는 눈빛이었다. 식탁 가까이 다가가 "오늘은 여기 한번 읽어보세요." 하자 기다렸다는 듯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셨다. 받침 있는 글씨도 제법 막힘없이 읽으신다. 어제보다 훨씬 속도도 빨라졌다.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오신 게 그저 놀랍다.


"요즘엔 TV 자막도 읽어보려고 해. 시장 이름도 읽어보고."
자랑하듯 말하시는 엄마의 표정은 밝았다.
"정말 잘하고 있어요."
내 말에 엄마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글씨를 계속 쓰다가 며칠 쉬면 글씨가 예쁘게 안 써지더라."

그 말이 깊이 와닿았다. 누구나 ‘지속’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또박또박 읽어 나가실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그 강한 의지를 배운다. 86세에도 이렇게 배움의 의지를 지닌 엄마처럼, 나도 평생 조금씩 공부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내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쓰고, 읽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건강을 계속 유지해 주셨으면 좋겠다.
“받침 있는 글씨는 못 읽겠다”는 엄마의 말은, 사실 ‘읽겠다는 의지’와 ‘겸손함’이 담긴 다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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