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기온이 37도를 훌쩍 넘는 날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곁에 계시던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다정하게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실수해도 괜찮아요, 갈아입으면 되니까요.”
그 말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시장을 다녀오신 길이었다. 급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어 물건을 사자마자 서둘러 오셨다고 한다. 휠체어에 앉은 채 들고 오셨다는 봉투는 여러 개. 도무지 어떻게 이 많은 걸 혼자 끌고 왔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나같이 검은 비닐봉지였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요즘 엄마의 관심사는 민생회복지원금을 알뜰하게 잘 사용하는 것이다. 어제는 참기름과 들기름, 그리고 참깨를 사오셨다. 들기름 한 병은 요양보호사 선생님께 선물로 주셨다. “아직 남아 있는데 왜 사셨어요?” 하고 여쭤보니, “명절 전에 사면 가격이 더 오를 수 있어서 미리 사왔지.”라고 말씀하신다. 물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부의 본능은 여전하셨다.
식탁 위에 검은봉지를 올리고 하나씩 꺼내 보았다. 국물멸치, 잔멸치, 호박씨, 황태포, 오이…
“호박씨는 왜요?”
“건강에 좋다더라. 암에 걸린 사람한테 좋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될까 봐, 이 더운 날씨에 굳이 그 무거운 걸 들고 오신 거였다.
엄마가 더위를 식히시라고 수박을 꺼내드릴까 여쭤보았다. 그러자 “몸이 더울 때 찬 거 갑자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다. 나는 수박을 내려놓고 조용히 엄마를 바라본다.
잠시 후, 엄마는 국물멸치를 가져와보라고 하신다. “다듬어 놓아야 음식할 때 편하지.”
멸치의 대가리와 똥, 뼈와 몸통을 분리하며 능숙하게 손질하시는 모습. 그 손길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슴이 조여온다. 딸을 위해 여전히 살림을 이어가는 엄마. 얼마나 많은 식탁 위의 온기가 그 손끝에서 나왔을까.
물건 정리가 끝나자, 엄마는 작은 비닐봉지를 가져다 달라고 하신다. 그 안에는 민생회복지원카드와 그동안의 영수증들이 들어 있었다. 일일이 꺼내시며 계산을 부탁하신다.
“얼마 더 쓸 수 있니?”
“삼만팔천 원이요.”
남은 금액을 들으신 엄마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써볼 것도 없는데…” 하시면서도,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진 식재료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자식들 돈이 아닌,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으로 산 물건들이라 더 기분이 남다르신 것 같다.
내가 가진 카드도 드리겠다고 하니 처음엔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차 기름 넣어도 되는… 그렇게 해.”
엄마는 언제나 나보다 내 걱정부터 하신다.
서울살이에 잘 적응하신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배워야 할 점이 많다. 그 힘든 몸으로도 시장을 다녀오시고, 계산을 꼼꼼히 하시며, 필요한 걸 스스로 챙기는 모습.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내는 법을 보여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나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