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87. 지혜와 욕구, 대화에 세련미를 더하다.
교양과 세련미. 인간은 야만인으로 태어나지만, 교양 덕분에 동물보다 나은 존재가 된다. 교양은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고, 교양이 높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수술 후 첫 외래 진료의 날. 그녀와 보호자는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동안 사진으로 확인했던 종양의 크기는 5.7센티였다. 그러나 항암 치료 6개월을 마치고 수술을 받은 뒤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9센티.” 의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숫자는 두 사람의 가슴을 단단히 옥죄었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줄어들어야 할 크기가 오히려 커졌다니. 방사선 치료와 추가 항암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의사는 내년 5월에 다시 보자고 했다. 보호자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공허했다.
종양내과에선 더 직설적이었다. “암 사이즈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임상치료를 권합니다.” 그 말은 그녀에게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안겨주었다. 항암제와 수술, 수많은 통증과 부작용, 기다림과 희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의 환자들을 이미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수술을 마쳤고 임상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살아가면서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이것도 그중 하나일 뿐일지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병원을 나서는 길에 그녀와 보호자는 서로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수술로 입원해 있던 시절, 옆자리 환자가 그녀에게 긴급재난지원비 관련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지원사항이 있으니 신청해 보세요. 몇 개월 치라도 먼저 받을 수 있답니다.” 그 말이 떠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보호자에게 말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상담해 보고 싶어요.” 보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상담을 가면 신분증만으로 지원 가능 여부를 알려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 된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작은 희망이 생겼다.
기관에 도착한 그녀는 3층으로 올라갔다. 한 사람이 상담 중이었다. 약 10분 뒤 그녀의 차례가 왔다. 신분증을 내밀고 조심스레 물었다. “2월부터 확인 부탁드립니다.” 상담 직원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어렵다는 답을 내놓았다.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순간 그녀의 기대가 무너졌다. “대부분 다 된다”던 말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실망은 크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집에 도착하니 창문 틈새로 바람이 거칠게 들어와 방 안을 휘감았다. 계절은 이미 깊어 있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그녀는 급히 옷을 꺼내 입었다. 거실에는 엄마와 큰언니가 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다. 판을 접으며 두 사람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 듣고 왔니?” 큰언니가 물었다. 그녀는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모두가 ‘완전관해’로 추가 치료 없이 끝날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큰언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곽청술 했을 때부터 3기인 줄 알았어.” 그러더니 덧붙였다. “이제는 예수님께 기대는 방법밖에 없어.”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찌른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그녀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함께 기도하자는 말이 아니라, 아직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위로였다. 하지만 큰언니의 말은 돌덩이처럼 가슴속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로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긴 투병의 시간 동안 그녀는 수많은 정보를 찾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항암과 수술, 치료의 고통은 몸에만 남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의 관계,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상처받곤 했다. 병원에서 들었던 숫자와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5.7센티, 9센티, 임상치료, 방사선… 숫자와 명칭들이 차가운 금속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옆 병상에서 건넨 작은 정보 하나에도 희망을 품고 움직였듯이,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삶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선택과 시도가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거실에서 엄마와 언니는 각자의 입장에서 많은 말을 했다. 무심한 듯한 그 모습 속에서도 그녀는 가족의 존재를 느꼈다. 말을 잇지 못했던 병원 길의 침묵도, 집으로 돌아온 뒤의 차가운 바람도 모두 그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현실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또 한 번의 치료와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병원, 오늘의 상담, 오늘의 실망과 서운함은 그저 긴 여정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 길이 끝났을 때,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견뎠고, 또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