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88. 때로는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할 때도 있다.
관대하게 처신하라. 또한, 처신이 탁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대한 사람은 시시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 모든 일을 너무 하나하나 따지지 말고,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서는 더 그래야 한다. 신경 쓰지 않았는데 모든 걸 알게 되는 건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모든 것을 알려고 드는 건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병원으로 향했다. 언니는 오빠가 좋아하는 겉절이를 만들겠다고 시장에서 배추와 재료를 사왔다. 무거운 장바구니에 팔이 쓸려 빨갛게 된 자국을 내게 보여준다. 병원에서 돌아오던 오빠는 집으로 향하다가 언니의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에 온 남동생에게 저녁 한 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언니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날 언니는 이미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다. 부엌에서는 쭈꾸미 불고기의 매운 향이 올라왔고, 식탁 위에는 겉절이가 놓였다. “너 때문에 고춧가루를 맘껏 못 넣었어.” 언니가 웃으며 말한다. 오빠는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나는 매운 걸 잘 못 먹는다. 그래도 결국 한자리에 모여, 언니가 바라던 식탁을 함께 둘러앉았다.
남은 술을 마시던 언니는 울면서 말을 꺼냈다.
“내가 맏이 역할을 못 해서 식구들이 고생만 했어.”
그 말에 오빠도 덩달아 울며 말했다.
“내가 아들 역할을 못 해서 네가 고생이 많다.”
어린 시절 고생담과 지금의 상황이 뒤섞인 대화가 이어졌다. 엄마는 “쓸데없는 이야기 좀 그만해”라며 한소리했다. 그런 엄마와 언니, 오빠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술에 취한 언니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힘들고, ‘역할을 못했다’는 그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기분만 나빠졌다. 속상해서 술을 마신다는 언니를 보며, 그 모습이 가족을 위로하는 말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돌아보니 나는 너무 많은 부분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노력했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에 닿지도 않은 것 같다. 막내는 걷지 못하는 엄마를 모시며 암투병 중이다. 그 아프다는 사실을 두고 각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불쌍하다, 못 해줘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 묻힌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계속 가족을 이해해주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어렵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버거워졌다. 상대방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오늘 같은 대화는 내게 너무 힘들다. 그건 내가 아직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억지를 부리고 모든 감당하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 가족을 위한다는 오만을 버리기로 했다. 같은 입장이 아니기에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의 70%만 이해야겠다. 관대하게 처신하는 나를 발견하는 하루하루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야만 이제는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다. 아픈 내 몸, 마음부터 다스릴 줄 아는 것이 가족에게 중요하고 큰 일이다. 모르고 넘어가고, 모르는 척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