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89. 자신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라. 자기 기질과 재능, 판단과 기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기 주인이 될 수 없다. 일을 할 때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보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일에서 자기 능력의 깊이와 무게를 조사해보아야 한다.
나는 요즘 자꾸 ‘자신을 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 기질과 재능, 판단과 기분을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을 읽고 난 뒤부터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남았다. 일할 때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 가늠해 보아야 한다. 내 능력의 깊이와 무게를 조사해 보는 일, 그것이 결국 나를 지탱해 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말이 참으로 버겁다. 암 치료를 시작한 지 아홉 달째, 나는 여전히 나를 알아가기는커녕 점점 더 미지의 세계로 밀려나고 있다. 우울한 생각을 떨쳐 내려고 애써도 어느새 우울에 잠식되어 있다. 나를 일으켜 세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런데 아직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마음속 한쪽이 텅 빈 채로 흔들리고 있다.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또다시 떨어질 듯 위태롭다. 항암을 시작하면서 손끝과 발끝이 먼저 반응했다. 무감각해지고, 갈라지고, 부서졌다. 이번에는 밴드를 붙여 보았지만 그것마저 쉽게 벗겨진다. 한쪽 끝만 겨우 붙어 있으면서도, 마치 나에게 매달리듯 아프다. 이 손톱 하나가 내 삶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만 같다. 계속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아직까지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지금의 나다. 쓰러질 듯 하면서도 하루하루를 견디며 붙들고 있는 내 모습과 닮았다.
어제 외래에서 ‘후항암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완전히 겁쟁이가 되었다. 항암의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말, 그 말이 내게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처럼 다가왔다. 이미 여섯 달 동안 두 가지 독성 항암제와 고가의 면역항암제를 견디며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 시간이 지나갔을 때 나는 ‘이제 끝났다’고, ‘이제는 숨을 돌릴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항암이라니. 나는 또다시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동안 나는 늘 긍정적인 척해 왔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내게 주어진 고통을 감추고, 작은 기쁨을 과장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더 이상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이 서글프다.
그러나 글을 쓰며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내가 나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힘의 증거 아닐까. 겁이 나면서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아직 나에게 회복의 길이 열려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척이 아니라, 진짜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이제야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더 깊이 알아야 한다. 기질도, 재능도, 판단도, 기분도,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의 한계도. 그래야만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무엇이 나를 살리는지’ 차분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힘이 들 때마다 회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다짐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오늘도 새끼손가락의 손톱은 떨어질 듯하면서도 아직 붙어 있다. 마치 내 삶이 그렇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흔들리고,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아직 버티고 있다. 그 모습이 비록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증거다.
이제 나는 겁쟁이가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겁을 내는 나, 울고 있는 나, 지쳐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나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 글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렇게라도 내 안의 두려움과 슬픔을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숙제다. 암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지나며, 나는 내 한계를 보고 있다. 동시에 그 한계 너머에서 여전히 살아 있으려는 의지를 보고 있다. 두려움과 함께 있지만, 아직 나를 알아가고 있다. 이 고통 속에서조차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