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지만 잘 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90. 인생은 짧지만 잘 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오래 사는 기술. 선하게 사는 것이 장수하는 기술이다. 삶을 빨리 끝내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어리석음과 비열함이다. 정신이 온전하면 육체도 온전해진다. 그리고 선하게 살면 내적으로뿐만아니라 외적으로도 오래 살게 된다.

새벽 다섯 시.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 내 방으로 잔잔하게 스며드는 소리가 있다. 성경책을 더듬더듬 읽는 엄마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늦가을 새벽의 공기처럼 맑고도 서늘하면서도, 속으로는 뜨겁다. 식탁의자에 앉아 계신 엄마 앞에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큰 성경책이 펼쳐져 있다. 무겁고 두꺼운 검은테의 돋보기가 코끝에 위태롭게 걸쳐 있고, 오른손은 성경책의 한쪽을 잡아 무게를 지탱한다. 왼손은 지금 읽고 있는 구절 위를 조심스레 누르며,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하는 소리, 종이가 가볍게 스치는 소리, 그것이 내 새벽의 배경음악이다.


그때, 옆방 문이 살짝 열리고 언니가 나온다. 눈 수술을 앞두고 있는 언니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를 안아 준다. “언니, 긴장되지?” 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마취하고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야.”라고 말해도 그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는 듯하다. 나는 한 번 더 말한다. “언니, 나도 수술하고 이렇게 잘 있잖아. 걱정하지 마.” 언니는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한다. “넌 끝났으니까 걱정이 없겠지?” 그 말에 나는 멈칫한다. 그런 뜻이 아닌데, 사람마다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언니는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 귀에는 여전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실 한쪽에서 묵묵히 이어지는 성경 읽는 소리, 매일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읽는 그 습관. 그 모습이 나는 그저 존경스럽다. 잠시 뒤, 종이를 넘기던 손이 멈추고 성경책을 덮는 소리가 난다. 엄마는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 예수님… 오늘 우리 큰딸이 눈 수술을 합니다. 아무 탈 없이 잘 끝나게 해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꼭 들어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아멘.”


그 목소리는 낮고 떨리지만, 그 어떤 화려한 기도문보다 깊고 간절하다. 나는 그 순간, 기도가 꼭 무릎을 꿇어야만, 교회에 다녀야만, 멋진 언어를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염원, 그것이 기도의 본질임을 86세의 엄마가 내게 가르쳐 준다.


내가 아는 엄마는 한평생 남을 먼저 챙기고, 자신은 늘 뒤로 미뤄두던 분이다. 성경책조차 평생 제대로 읽어본 적 없던 엄마가, 이제야 글자를 더듬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고 있다. 그것도 딸을 위한 기도로 이어진다. 그 모습은 내겐 경건하고도 아름다운 예술 같다.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어깨로 붙잡고 있는 한 노인의 손, 돋보기를 통해 글자를 겨우 읽어 내려가면서도 그 의미를 전부 자신의 마음으로 삼키는 모습, 그리고 무릎을 굽혀 한마디씩 떼어내듯 기도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내 눈에, 내 가슴에, 오래도록 박힌다.


언니는 방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한동안 식탁 앞에 앉은 엄마를 바라본다. 성경책을 덮고 두 손을 모은 채, 입술을 떨며 속삭이는 엄마.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그 겸손함 속에, 나는 역설적으로 세상의 모든 지혜를 본다. 어떤 학자도, 어떤 설교자도 대신할 수 없는 지혜와 사랑이 거기에 있다.

엄마의 기도는 단 한 사람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그 울림은 내 삶 전부를 감싼다. ‘선하게 사는 것이 장수의 기술’이라는 내 문장의 첫머리가 사실은 엄마의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나는 이제야 안다. 엄마는 오래 살기 위해 선하게 산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살다 보니 오래 사신 분이다. 그래서 그 기도가, 그 목소리가, 그 손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가는 기도의 형상으로 남는다.


언니의 수술이 끝나면 나는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새벽 다섯 시, 두꺼운 성경책과 돋보기, 떨리는 입술로 딸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언니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던 나. 삶이란 결국 이런 순간들의 연속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지만, 이 순간의 따뜻한 숨결과 기도의 울림은 남는다. 그것이 우리가 ‘잘 살아낸 삶’이라 부르는 것일 테다.


인생은 짧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살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마음은 영원하다. 엄마가 오늘 내게 보여 준 모습은 내 인생의 귀퉁이에 놓일 가장 오래가는 빛이다. 선하게 살아낸 삶이 남긴 향기, 그 기억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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