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91.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준비하라
경솔함이 의심되지 않을 때만 행동하라. 일하면서 스스로 실패를 의심한다면, 지켜보는 사람은 그실패를 확신할 수밖에 없다. 신중하지 못하다는 의심이 드는데도 행동하는 건 위험하다. 그럴 때는 오히려 하지 않는 게 더 안전하다.
내가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된 것도 삶을 다시 정돈하고 싶어서였다. 암 투병과 가족 돌봄, 그리고 긴 직장 생활의 피로 속에서 나는 새로운 배움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수지를 만났다. 수지는 늘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포용하는 힘이 있는 친구다. 처음 강의실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나보다 한참 어려 보였지만 알고 보니 나와 또래였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인 이 학과에서, 수지는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는 모습에서 이미 사회복지사의 자질이 느껴졌다.
수업은 이론과 실습이 함께 이루어진다. 과제는 많고 시험도 잦다. 하지만 수지는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연세가 많아 어려워하는 동기들에게 자신의 정리 노트를 나눠 준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건네는 노트에는 그녀가 강의 내용을 요약하며 덧붙인 설명과 그림이 빼곡히 들어 있다. 그 덕분에 시험을 무사히 넘긴 동기들이 많다. 나 역시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고마움을 전하면 수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한 일인데요”라고 웃는다. 그 미소 속에는 계산 없는 따뜻함이 있다.
학과 운영진은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수업 외 활동을 조직한다. 누구보다 바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수지는 항상 발 벗고 나선다. 신입생 환영회 준비, 지역 복지기관 견학, 기말고사 전 스터디 운영까지… 그녀가 손을 대면 일들이 척척 진행된다. 어떤 때는 늦은 밤까지 자료를 만들고, 어떤 때는 집에서 간식을 직접 준비해 오기도 한다. 이런 일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그저 필요한 일을 보고 먼저 움직일 뿐이다.
이전 과대표는 손주들을 돌보며 학교를 다니는 분이었다. 딸 두 분을 이화여자대학교에 졸업시켰다고 자주 이야기하셨다.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은 존경스럽지만, 수업 중 본인 이야기를 길게 하실 때 교수님이 난감해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해받길 바라시는 듯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해야겠다는 표정이셨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종종 늘어지거나, 행정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건강 문제로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다시 강의실로 돌아갔을 때, 과대표가 바뀌어 있었다. 기존 과대표가 사임했고, 수지가 새 과대표가 된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이제 분위기가 달라지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실제로 교실은 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주임교수님의 일정이 차질 없이 관리되고 있었고, 공지사항도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시험 전에는 동기들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해 놓아 모두가 감사해했다. 대부분 직장을 다니며 공부하는지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데, 그 작은 정성이 큰 위안이 되었다.
과대표와 총무는 수시로 문제 될 사항을 미리 파악해 의견을 묻고 처리했다. 누군가의 불편이나 요청이 쌓이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화하고 조율했다. 덕분에 학급 내 갈등이 줄어들고, 모두가 서로를 더 존중하게 되었다. 수지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도 분위기를 바꾸는 힘이 있었다.
특히 고마운 점은 컴퓨터나 온라인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동기들을 위해 수지와 총무가 직접 PC 작업을 도와준 것이다. 과제 제출 방식, 학사 시스템 사용법, 온라인 자료 검색 등에서 막히는 분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누군가 “이건 나도 해 드릴 수 있어요”라고 나서면, 그때는 또 웃으며 자리를 내준다. 그런 모습에서 ‘복지를 공부하는 학생이 동기의 복지를 먼저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제대로 준비된 사람’의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준비된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를 먼저 알아채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고, 신뢰를 조금씩 쌓아 가는 사람이다. 수지는 그 모습을 보여 준다.
나 또한 수지를 보며 배운다. 예전의 나는 어떤 일을 맡으면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부터 했다. 그래서 준비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의심했고, 결국 그 불안이 행동에 묻어나왔다. 하지만 수지를 보며 느낀다. 철저한 준비와 따뜻한 태도가 함께할 때, 불안은 줄고 신뢰는 커진다.
이제 나는 다시 다짐한다. 불안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준비하자. 경솔함이 의심되지 않을 때만 행동하자. 그리고 그 준비 속에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를 담자.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중한 삶’이고,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길임을, 수지를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