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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사귄 친구, 그리고 담담한 이별

by 또 다른세상

늦여름, 초록빛 풍경을 눈에 가득 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문득 엄마가 좋아하는 순대가 생각나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 입구에는 늘 보이던 할머니의 꽃가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요즘 국화가 제철인지 노란색, 흰색, 보라색 화분들이 크고 작게 가지런히 놓여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인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줄을 서서 먹는 칼국수집이 나타났다. 직접 면을 뽑는다는 곳이라 한 번 들러보고 싶었는데, 항암 치료로 미각을 잃었던 터라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기억이 스쳤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장 안은 물건을 내리는 용달차,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들로 뒤섞여 복잡했다.

드디어 깔끔한 분식집에 도착했다. 꼬마김밥과 각종 튀김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돼 있었다. 고추튀김, 김말이, 오징어튀김이 특히 맛있어 보였지만, 튀김은 안 먹기로 다짐한 터라 그저 침만 삼켰다. 가운데 큰 양푼에 순대와 각종 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을 줄 알았는데, 앗! 쟁반이 텅 비어 있었다. 큰맘 먹고 찾아왔는데 실망스러웠다. 기다릴 수도 없어 결국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니 산책을 다녀온 듯한 엄마와 요양사님이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드시려는 참이었다. “시간도 잘 맞춰 오네.” 두 분이 웃으며 맞아주셨다. 시장에서 떡과 땅콩을 사왔다며 내게 권했다. 언니도 샌드위치와 식빵을 한 보따리 사다 놓았다. 접시에 먹을 만큼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엄마는 “요양사 선생님이 사 주셨어. 땅콩이 참 고소하다.”라며 나도 맛보라고 했다.


우리 셋은 떡과 빵, 땅콩까지 맛있게 나눠 먹었다. 잠시 후 요양사님이 퇴근 전이라며 화투를 치자고 하셨다. 놀이터에 계시던 할머니들은 나오셨냐는 내 물음에 “세 분 정도만 계셨다.”며 화투놀이를 계속하셨다.

요양사님이 가시고, 병원에 다녀온 큰언니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엄마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을 꺼내셨다. 놀이터에서 늘 함께 이야기 나누던 친구 한 분이 넘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엄마와 요양사님이 달려가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별일 아니라며 일어나 걸어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그 길이 위험하니 다니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친구가 놀이터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분께 물어보니 그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언니는 “어르신들이 놀이터에 안 나오시면 돌아가신 경우가 있더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신기했다. 며칠 전까지 함께 웃고 이야기 나눈 분이 세상을 떠났는데 엄마는 어쩌면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낯선 곳에서 사귄 친구의 죽음은 엄마에게도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것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눈앞에 있는 현실이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도 엄마처럼 담담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누구의 죽음이든,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니까.

지금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마디 더 따뜻하게 건네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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