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3부 인생은 짧지만 잘살아낸 삶의 기억은 영원하다.
안목
111. 친구는 또 다른 나다
친구를 사귀라. 친구는 또 다른 나다. 모든 친구는 좋고 현명한 존재다. 우리가 얻는 최고의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친구 아니면 적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친밀한 친구가 아니더라도, 호의적인 사람들과 매일 조금씩 마음을 나누는 일은 중요하다. 잘 선택한 인연은 결국 믿을 만한 친구로 남는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근무 중에 친구가 찾아왔다. 일에 쫓기던 시간이라 반갑게 맞이할 여유조차 없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친구는 네잎클로버 키링을 내밀며 “이거 너 주려고 왔어”라고 말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와 선물을 건네고는 조용히 떠났다. 그때는 그 마음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 다른 친구와 통화하던 중, 정희의 어머니가 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그 엄마와도 자주 인사를 나누곤 했다. 부고도 알리지 않고, 그냥 혼자 찾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정희. 이제야 그 침묵이 얼마나 깊은 슬픔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위로 한마디 못하고 돌려보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얼마 전 추석 연휴, 병원 일정으로 집을 나서던 날이었다. 정희는 내 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내가 다니는 병원으로 찾아왔다. 두 달 전, 다른 친구를 통해 정희 남편의 부고를 전해 들었지만, 항암 중이라 조문도 가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만 전하고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그런 나를 보러,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친구. 오히려 내 동선을 지켜주겠다는 듯 묵묵히 내 곁을 걸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작았던 얼굴이 더 작아져 있었다.
병원 식당에서 미역국을 주문했다. 나는 꾸역꾸역 밥을 다 먹었지만, 친구는 국물만 몇 숟가락 떴다. “왜, 밥 못 먹어?”라고 묻던 내 질문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위가 다 망가지고 허리까지 아팠던 친구였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삼십 번은 넘게 울먹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은 늘 한 박자 늦었다.
에어컨 바람이 세게 불어오자, 정희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너 좀 추울 것 같아.”
그리곤 준비해온 머플러를 내 목에 둘러주었다. 병원 오는 길에, 여러 사람에게 물어가며 나에게 어울릴 선물을 골랐다고 했다. 그 마음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방에서 온 정희는 서울 사는 나를 끝까지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서야 돌아갔다.
나는 찌질한 친구였다.
받기만 하는 친구, 미처 알아주지 못한 친구였다.